<창세기 4장 – 가인과 아벨>
- 가인은 ‘소유’ 라는 뜻이다. 이는 하와가 그를 낳고 기쁨과 감사와 벅찬 기대를 가지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도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그녀가 이 애는 약속의 씨라고 스스로 잘못 생각하여 그 아들을 찬양하는 착각을 가졌다고 한다. 자녀들이 출생할 때, 그들이 장차 무엇이 될 것이라고 그 누가 미리 예측할 수가 있단 말인가? 최소한도 주님으로부터 온 사람으로서 그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그 사람이 주님에게 원수가 되었다. 피조물에 대한 기대가 적으면 적을수록 이에 대한 실망도 그만큼 작아지는 것이다.
- 아벨은 ‘공허’ 라는 뜻이다. 그녀가 가인에게서 약속의 씨를 얻었다고 생각했다면, 다른 아들을 가지는 것은 그녀에게는 공허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것을 가지는 것이 모두 무(無)와 같다. 또한,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장수하면 할수록, 세상의 공허함을 더 많이 보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초에 소유물이라고 좋아하던 것도, 후에 가서는 아무런 쓸모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아들에게 준 이름은 모든 인간에게 붙여진다. 곧 모든 사람은 기껏해야 아벨 - 공허이다(시 39:5).
- 아벨은 양 치는 일을 택했다. 이 직업은 명상과 헌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모세와 다윗은 양을 치면서 고독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교제 했던 것이다. 우리를 죄와 가장 멀리 있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즐기는 기회를 가장 많이 주는 그런 직업이 가장 좋은 직업이요 우리가 선택해야 할 직업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 모든 신앙의 행위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에 있다. 이 목적을 이룩하면 잘한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헛된 예배가 -고 마는 것이다(고후 5:9).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 그들이 가져온 제물에 차이가 있었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좋은 제물을 드렸다고 뚜렷하게 말씀되어 있다(히 11:4). 가인의 것은 단지 창조주를 인정하는 표시로 드리는 것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벨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속죄의 표를 나타내는 속죄의 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진정시키고 중보자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바랐던 것이다.
- 가장 큰 차이는,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고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따른 원리 자체에 차이가 있었다. 아벨은 의롭게 된 세리와 같이, 회개의 마음을 가진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가인은 오만하고 우쭐대며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바리새인과 같아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가 없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을 차별하심에 대해 불쾌하게 여겼다. 가인은 심히 분해서, 그 안색에 우울한 표정이 나타났다. 그의 표정이 그의 잘못을 스스로 증명했다.
- 우리의 죄악된 심정과 걱정은 그 이유에 대하여 냉정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대부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 내가 노하는가? 그에 대한 참으로 정당한 이유가 있는가?’ 가인은 하나님에게 화낼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앞에 생명과 사망, 축복과 저주를 두시고, 인간의 선택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게 하셨다.
- 하나님은 “네 동생처럼 네가 선을 행하였다면 그의 제물을 받은 것처럼 네 것도 틀림없이 열납됐을 것이다”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은총을 스스로 버린 자 외에는 누구에게도 그 은총을 거절하지 아니하시며, 하나님을 적대하는 자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원수가 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가 받으시기에 부족하다면 그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모든 잘못은 우리들 자신의 것이며, 우리들이 할 바를 행하게 되면 그의 긍휼하심을 받지 못했을 리 만무한 것이다.
- 처음으로 육체의 생명을 잃고 죽은 자는 성도요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사랑을 받던 아벨이었다. 즉, 무덤으로 간 첫 사람은 하늘로 갔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죽음에 대한 안심을 주시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먼저 아벨에게 하늘에 이르는 관문을 여셨다. 이것은 죽음의 성질을 변경시킨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시는 시기에 알맞은 운명이 되었다. 그러므로 죽음의 공포를 벗어 버리자.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자는 결백하고 무해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죽는 자에게는 영예롭고 영광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놀랍도록 변화되어 찬양을 받을 만큼 된 죽음의 특성이다.
- 가인은 땅에서 나는 식물을 박탈당한다. “네가 밭 갈아도 땅이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는 그의 즐거움 특히 그의 직업에 대한 저주이다. 만일 땅이 그 효력을 주지 아니한다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힘을 하나님께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악한 자의 사악함은 그들의 모든 일과 모든 소유에도 저주를 초래하며(신 28:15 이하), 이러한 저주는 그들의 모든 소유물이 오히려 괴로움이 되게 하고, 행하는 모든 일에 실망을 안겨준다. 또한,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그 어느 곳에서나 안식을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의 앞을 떠난 가인은 결코 쉼을 찾지 못했다.
<창세기 5장 – 족보>
- ‘아담 자손의 계보’ 란 본 장의 첫 구절이 장 전체의 제목이요 요지가 된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창조주가 아니므로 그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인간의 조물주께서 인간의 거동의 지휘자요 그 행동의 중심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어버이들은 흔히 그 자녀들을 축복한다.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도 그의 자녀들을 축복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어버이들은 단지 축복을 간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축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 사람(Adam)이란 흙 곧 붉은 흙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 이름을 주셨다. 아담은 직접 다른 피조물들에게 이름을 주었으나, 자기 자신의 이름만은 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어떤 영광스럽고 화려한 칭호를 붙이고 뽐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근본의 끊임없는 기억이 되고 “자기를 떠낸 반석과 자기를 떠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름을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은 존재는 티끌과도 유사한 것이니 조금도 자랑할 바가 없는 것이다.
- 셋에게서 가장 주목할 점은, 아담이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지만, 타락하였을 때는 자기의 형상을 따라 자기처럼 죄 많고 불결하며 연약하며 유혹에 빠지기 쉽고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비참한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이것은 아담 자신이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아담은 그것을 자기 자손에게까지 물려 줄 수 없었다. 은혜는 피를 따라 계승되지 않지만, 타락이란 그러하다는 것을 주목하라. 즉 죄인은 죄인을 낳지만 성도가 반드시 성도를 낳지는 못하는 법이다.
- 계속해서 죽었더라고 반복되어 있는 것은, 죽음이란 만인에게 예외 없는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특히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수양을 위하며 타인의 죽음을 관찰하고 스스로 단련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건장한 자들도 죽었다. 훌륭하고 부유한 자들도 죽었다. 현명하고 지각 있는 사람들도 죽고 말았다. 선한 사람들이요 매우 유익한 사람들이라 해도 역시 죽고 마는 것이다.
- 특히 주목할 것은 이들 모두가 매우 장수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사람을 보다 더 신속히 채우시고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지식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보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수명을 늘이신 것이다. 그 때에는 성문화된 글이 없어서 전승이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노아를 제외하면 여기에 있는 다른 족장들은 모두 아담이 죽기 전에 출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담에게서 창조와 낙원, 타락과 약속, 그리고 경건한 예배와 신앙 생활에 관한 하나님의 계율들을 충분하고도 만족스럽게 이어받았을 것이다. 어떠한 실수가 있었을 때에는 그것을 교정하기 위하여 아담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 성령께서는 에녹에게 “살았노라” 고 말씀하시는 대신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노라” 고 말씀하셨다. 남들은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향하여 살아가는 동안,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이 그에게는 삶 그 자체보다도 훨씬 더 좋은 일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24절)고 하였다. 그는 남들처럼 살지 않았고 남들처럼 죽지도 아니하였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믿음으로 그와 동행하여 그를 기쁘시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친히 영광을 주신다.
- 셈과 함과 야벳. 창세기 10장 21절을 보면 야벳이 장자임이 분명한데 셈이 먼저 기록된 것은 창세기 9장 26절에 나타난 대로 계약이 그에게 상속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불리고 있다. 아마 그에게 장자권도 부여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로부터 머리인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가 계승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셈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이름’ 이란 뜻이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진 자가 그에게서 태어날 때까지, 그 자손들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언제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셈을 맨 앞에 세움으로써 만물 중에 현저하게 드러나야 하는 그리스도를 사실상 맨 앞에 세우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6장 – 심판과 구원의 방주>
-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그리고 악한 세상에 관한 경고가 되기 위하여 옛 세계가 멸망한 이야기에 접하기 전에 그 세상의 타락성과 하나님에 대한 배신과 반항에 관한 기사를 우리가 충분히 보게 된다. 그 멸망은 절대 주권에 속한 행동이 아니라 필연적 정의에 속한 행동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의 영예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들은 옛 세계에 악을 가져오게 한 원인이 된 사실을 보게 된다.
-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축복의 결과였던 것이나(창 1:28), 인간의 타락은 이러한 축복을 너무나 남용하고 왜곡시켜 그 축복은 저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죄는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큰 죄악의 기회로 이용하고 있다. 신약 성서의 교회에서는 “제자들의 수효가 많아졌을 때에 원망하는 말도 야기되었던” 것이다(행 6:1). 그 결과는 악하게 드러났으니,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고 이방인 아내를 취했다”(고후 6:14)는 사실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동의 없이 결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즉시 그들을 없애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와 같은 결혼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며 그 자녀들은 어느 쪽을 닮을 것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 기다리셨다. 그리고 흔히 그렇듯이 그들은 가장 악한 쪽을 닮게 되었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장부들이었고 ‘유명한 사람들’ 이었다. 자기들 주위에 있는 모든 자들에 비해 너무 강했으므로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무엇이든 행할 수 있었다. 남들을 압제할 수 있을 만한 대단한 힘을 가진 자들이라도, 자신을 억누를 만한 힘은 좀처럼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큰 힘은 사람들에게 그만큼 큰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야겠다.
- 하나님의 눈은 그 이상의 것을 보셨다. “그들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 이것은 쓴 뿌리, 즉 더러워진 샘이었다. 세상의 온갖 횡포와 압제, 온갖 향락과 방종이 그 본성의 부패에서 흘러 나왔다. 욕심이 그것들을 잉태하였다(약 1:15; 마 15:19). 그들에게서는 선이란 것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니 죄의 흐름은 가득차고 강하며 끊임이 없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신 것이다(시 14:1-3).
-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인간적 표현법을 따라서 나타낸 것이다. 이 말이 하나님에게 어떤 감정이나 근심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하신 마음을 동요시킬 수 없다. 그에게는 마음의 변화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은 그의 길의 변화를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올바르게 지으시고 나서 “쉬고 평안하셨으니”(출 31:17),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 자신의 솜씨를 기뻐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이 배신하고 말았으니 진노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변한 것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다. 그러나 그가 인간을 구원하신 일을 한탄하신 것은 결코 볼 수 없다.
- 하나님은 사람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우리의 창조주이신 이는 우리의 통치자가 아닐 경우에는 우리를 멸망시키는 자가 되리라는 것이다. “내가 그를 창조했는데도 배은망덕하니, 내가 그를 멸하겠노라” 하는 것이다. 생존의 목적에 합당치 아니한 자는 그 생명을 잃게 된다. 짐승들까지도 이 멸망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으므로 사람과 함께 멸망 받아야만 했다.
-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노여워하셨을 때에 노아에게는 은혜를 베푸셨다. 그 안에서 선한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그는 매우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고전 15:10). 하나님은 노아를 ‘그의 계약의 사람’으로 삼으셨다(18절). 하나님께서 계약을 세우실 때에는 하나님 자신이 친히 정하시고 확실하게 하시며, 그것을 유효하게 하신다. 따라서 그의 계약은 영원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손해 본 바를 보상하려 한다든가 하나님 안에서 우리들 자신을 위한 행복을 추구하려고 애 쓸 필요가 없다.
-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지시하셨다(14-16). 이 방주는 항해하기에는 적합치 아니한 낡은 배와 같은 것이었다. 물 위에 떠 있으면서 물이 줄어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는 모든 종류의 생물을 암수 한 쌍씩을 방주로 이끌어들여야 했었다. 그러나 그가 이들을 이끌어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발적으로 그에게 나아오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20절). 우리는 이 땅에서의 죽을 때와 심판날에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하며 방주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