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3장 – 아브라함과 롯>
- 아브람의 재산은 “매우 풍부하였다”(2절). 히브리 원어로는 그가 매우 “무거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귀라고 하는 것은 무거운 짐이 된다. 소유로 인해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가 되기 때문이다(합 2:6). 부유에는 그것을 모으는 염려라는 점이 있고, 그것을 지키려는 두려움의 짐이 있으며, 그것을 쓰는 데는 유혹이라는 점이 있으며, 남용에서 오는 죄책의 짐이 있으며, 그것을 잃으면 슬픔이란 짐이 있게 되며, 마침내는 이와 관련하여 남의 손에 넘겨야 할 계산의 짐이 있게 되는 것이다. 과하게 소유하는 것은 사람을 무겁고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 여기서는 아브람과 롯이 불행한 관계에 빠지게 됨을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는 떨어질 수 없는 벗이었으나(5절과 12:4 참조) 이제는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부유함 때문이었다. 아브람이 얼마나 부유했는가 함은 이미 읽었다(2절). 지금 여기서는 “아브람의 일행이었던 롯도 역시 부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들은 서로가 매우 부유했기 때문에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치 못하였다. 즉 서로가 즐겁고 화평스럽게 동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부귀가 흔히 친족이나 이웃들과의 분쟁과 논쟁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것이 바로 “부유하려고 하는 자들이 빠지게 되는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의 하나인 것이다(딤전 6:9). 부유함이라고 하는 것은 논쟁할 문제를 야기하고, 흔히 싸움을 유발하게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교만하고도 탐욕스럽게 함으로써 분쟁의 정신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내 것과 네 것’은 이 세상에 싸움을 일으키는 화근이 된다. 가난과 괴로움, 그리고 곤궁과 방황 등은 아브람과 롯 사이를 분리시키기 못하였으나, 부유함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겠다.” 이는 아브람이 롯에게 선취권을 주고, 자기는 남는 것을 취하겠다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아브람이 먼저 택해야만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권리를 양보한다. 화평을 위하여 양보하고자 하는 일은 숭고한 승리이다. 그것이 곧 우리 자신과 정욕의 정복임을 명심하자(마 5:39, 40). 많은 경우에 있어서 평화를 위해 희생된다는 일은 영예의 결실이 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유익이 되기도 한다.
- 롯이 “문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보았다.” 그 곳은 소돔이 있던 평야였다. 롯은 그 모든 들을 택하였다(10,11절). 에덴 동산과 같은 그 계곡은 이제 그에게 지극히 즐거운 전망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가 보는 대로는, 그 곳의 조건이 매우 좋았다. 지상의 모든 기쁨이 거기에 있어 보였다. 그는 자기가 그같이 비옥한 땅에 살면 분명히 번창하여 매우 부유하게 될 것이며, 안락하게 정착하게 될 것이라는 것밖에는 아무 다른 생각이 없었다. 이것이 그가 본 전부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그에 관하여 듣는 그 다음 소식은, 거기서 곤욕을 당하고 자신과 재물이 모두 사로잡혀 갔다는 것이다.
- 육욕적인 선택은 죄의 선택이며, 좀처럼 번성하는 일이 없음을 명심하자. 이해 관계나 직업, 거주지, 또는 안정을 택하는 일에 있어서 육신이나 눈의 욕망, 또는 이생의 교만에 이끌리면서, 영혼과 신앙의 유일을 고려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길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축복을 기대할 수도 없다. 흔히 그들이 목적 삼고 있던 모든 것에서까지도 실망할 뿐이며, 또 자기들에게 만족을 약속해 주었던 그것을 놓칠 뿐이다. 우리는 모든 선택의 과정에서 다음 원칙을 따르자. 곧 영혼에 가장 좋은 것이 우리 자신에게도 최선의 것이라는 원칙이다.
- 어떤 죄인들은 좋은 땅에 산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이 더욱 악해진다. 소돔 사람들이 바로 그와 같았다. 교만과 식량의 풍족 그리고 태평함이 소돔 사람들의 죄악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악행은 그들의 땅이 생산해 낸 지극히 큰 풍요로 뒷받침되어 있었던 것이다(겔 16:49).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들의 번영은 저들을 멸망케 하는 것이다. 악이 그 결정에 이르면, 멸망이 멀지 않음을 기억해 두자. 죄악이 만연됨은 다가오고 있는 심판의 전조임이 분명하다.
<창세기 14장 – 멜기세덱>
- 아브람이 왕들을 섬멸하고 돌아왔을 때에 소돔 왕이 그에게 보인 존경의 언사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에 대한 특별한 기사를 기록하기 전에 멜기세덱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다른 영광스러운 일들이 그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히 7:1 이하). 이는 하나님의 아들 곧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그런 이름으로 아브람에게 알려졌으며, 그 후에는 의로운 명분을 간직하고 평화를 주는 왕으로 아브람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어떤 평범한 인간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히 7:3)고 일컬어졌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멜기세덱은 항상 살아 있고 또 제사장으로 있다(히 7:3, 8)고 증거되어 있다. 게다가 바울 사도는, 이런 일은 유다에게서 연유되신 우리 주님에게 해당되는 일로 삼고 있다(히 7:13, 14).
- 그는 두 가지를 언급했다. 먼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이라 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 완전함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가 기도에서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보고 또 그렇게 부르는 것은 우리들을 신앙과 경외심과 크게 도움이 됨을 명심하자. 그 다음 ‘천지의 주재시오’ 라고 했으니, 모든 피조물의 마땅한 주인이시오, 그것을 다스리시는 여호와라는 뜻이다. 그가 모든 것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가 위대한 하나님이시며 크게 찬송을 받아야 함을 뜻한다(시 24:1).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복되다.
- 그는 아브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20절).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우리의 모든 승리의 영광을 받아 마땅하다(출 17:5; 삼상 7:10, 12; 삿 5:1, 2; 대하 20:21). 그 모든 승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의 적들보다 높으시다는 것(출 18:11)과 우리들보다 높으시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그분 없이는 우리는 아무 일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아브람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이는 곧 노획물 중의 십분의 일이었다(히 7:4). 하나님께로부터 뚜렷한 긍휼을 입었을 때에는 경건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어떤 특별한 행동으로 우리의 감사를 표명해야 한다. 우리의 위대한 멜기세덱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는 경의를 표하여야 하며, 우리들 각자는 그 분을 우리의 왕과 제사장으로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의 십일조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고 바쳐야 함을 유의하자.
- 아브람도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 했다. 멜기세덱이 조금 전에 사용한 것과 동일한 칭호이다(19절). 다른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께 관하여 말하는 방법을 배우고, 하나님의 일을 훌륭히 말하는 자들을 모방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믿음이 굳고 선한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개선을 도모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모방하여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창세기 15장 – 믿음의 의>
-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영원한 안전과 행복을 보증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시는 안전이다. “나는 너의 방패라”고 말씀하시니 그와 함께 하시고 돌보시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뿐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신 분이다(대상 17:24 참조).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에게 대항하는 온갖 파괴적인 죄악에서 그들을 안보하는 방패요, 그들에게 준비가 되는 방패이며, 그리고 그들의 주위를 둘러싸는 방패이시니, 장래에도 그리할 것이며, 또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혹케 하고 괴롭히는 모든 공포를 잠잠케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배푸시는 행복이다. 하나님은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이라고 하셨다. 즉 상급을 주시는 자일 뿐 아니라 상급 그 자체라는 것이다. 아브람은 소돔 왕이 제의한 보상을 기꺼이 거절했으나,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 때문에 그의 상급이 상실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시리라는 약속을 의미한다. 하나님 자신이 거룩한 영혼들의 선택되고 약속된 행복이 되니, 이 세상에서 택하여 내고 보다 나은 곳을 약속해 주는 행복이 되신다. 그가 곧 ‘그들의 상속과 분깃’이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은 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신 직후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無子)하나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지극히 큰 잘못이라 하겠다. 하나님과 계약적 관계에 있다는 것의 이점과 하나님께 관심하는 일의 이점이 모든 세상적 위안의 결여를 능히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그 계약 관계와 관심의 이점을 올바로 평가하지 못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 그러나 아브람이 여기서 약속된 씨에 유의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그의 욕망이 간절함은 매우 본 받을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위대한 축복에 대한 보증과 자기와 메시야와의 관련에 대한 확증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그에게는 무의미했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에 대한 기대를 품으라고 이미 아브람에게 격려해 주신 바 있었다. 그는 부귀와 승리와 명예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주요한 문제가 회의로 남아 있는 한, 모든 것이 그에게는 무의미 했다. 그리스도와 새 계약에 관한 우리들의 관심에 어떤 충분한 증거를 얻기까지는, 다른 어떤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이것도 저것도 내게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이 나아간다면, 그 모든 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랴?’
-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들의 약속을 분명히 해 주셨다(4절). 아브람의 염려와 달리, “너의 집에서 길리운 자가 너의 후사가 될 것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난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고 하셨다. 이 같은 약속에 대한 보다 큰 확증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이끌어내고 하늘의 별을 보여 주셨으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5절)고 말씀해 주셨다. 그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했다. 즉 계약을 주신 이의 저항할 수 없는 능력과 범할 수 없는 신성을 의지하여 지금 자기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을 믿었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이와 같은 아브람의 믿음을 그 얼마나 찬미했으며 표본으로 삼고 있었던가를 살펴보자(롬 4:19-20). 그의 믿음은 약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믿음이 우리 각자 속에 역사하도록 하신다.
-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곧 아브람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받아들이셨고, 아브람은 “믿음으로써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히 11:4). 그러므로 신약 성서는 율법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고 역설하는 바이다(롬 4:3; 갈 3:6).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신 바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약속을 실제로 확고히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일은, 그 약속 안에 내포되어 있는 모든 축복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자. 아브람처럼, 모든 믿는 자들은 의로와진다.
-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와 맺은 계약을 확증하는 것이요, 약속하신 바는 분명히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아브람이 확실히 믿게 하여 그에게 확고한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아마 쪼개진 두 조각 사이로 지나간 그 풀무와 횃불은 그 제물을 불태워 소멸시킴으로써 그 제사를 완전케 했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 제시를 열납하셨음을 입증해 주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계약은 제사로, 곧 위대한 희생 제물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지는 것이며, 속죄함이 없이는 어떠한 계약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분명하다. 그리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했다(요 3:36). 믿는 자는 이미 하늘 나라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이 분명히 거기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