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 – 믿음의 순종>
- 아브라함은 처음에 믿음으로 자기 고향을 떠났고, 하나님과의 친교를 나누면서 오랜 정착 생활을 해왔다. 고향을 떠날 때 아브라함은 자기 아버지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자기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말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들어 올리셨다”고 읽기도 한다.
-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은, 간단히 말하면, “아브라함아, 가서 네 아들을 죽여라”고 하는 것이었다. 히브리 원어에는 이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 표현되고 있다. “자 이제 네 아들, 네 외아들, 곧 네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쳐라”고 되어 있다. 제사 장소는 모리아 땅이라고 했다. 거기까지 가려면 사흘 동안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는 사흘 동안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일에 대하여 심사숙고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로 했다면 그것은 강제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와 스스로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합당하고 또 명예로운 것으로 칭송 받을 수 있는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여기에서 우리는 이 가혹한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시험받을 때에 이삭을 드렸다”(히 11:17).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그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믿음에 따라 행동했는지를 볼 수가 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3절). 아침에 명령을 그대로 실행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는 조금도 지연시키지 않았고,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으며, 혼자서 궁리해 보는 시간도 갖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충심으로 행하는 자는 신속히 실행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지체하고 나면, 시간을 잃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강퍅해지는 법이다.
- 사라에게는 이 일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사라가 막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알리지 않고 여행을 한 것이다.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방해를 이겨야 하듯이,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많은 방해물도 극복해야 한다. 그는 자기의 종들을 얼마쯤 거리가 떨어진 곳에 남겨 놓았다(5절). 그래서 종들이 참견해 들어와, 이 기이한 봉헌에 어떤 장애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삭은 틀림없이 온 집안의 귀염둥이였기 때문이다.
-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답변한 것은 매우 지혜로운 것이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친히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제물을 준비하시리라고 하는 것을 뜻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의미가 되어버렸다. 즉 이삭 대신 제물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첫째로, 이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었다. 천지간에 아무도 번제로 드릴 양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속죄양을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시 89:20). 둘째로, 우리가 드리는 모든 감사 제물도 역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그 마음을 준비시켜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시 10:17).
- 이삭이 구출되었다(11, 12절). 이삭을 드리라는 명령은 다만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험 결과 아브라함은 자기가 이삭을 사랑하는 것보다 참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내가 이제야 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전부터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이제 아브라함은 그 사실에 대한 가장 잊을 수 없는 증거를 보여드린 것이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어떤 증거를 보일 필요가 없어졌다. 이 사실은 약속된 메시야, 곧 축복된 씨와 관련해서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는 이삭을 대신한 이 수양처럼 우리 대신 희생을 당하셨다.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것이다.
<창세기 23장 – 사라의 죽음>
- 사라의 죽음(2절). 아무리 장수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죽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사라로 인하여 ‘슬퍼하며’ 또 ‘애통하였다’고 했다. 그의 슬픔은 가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것이었다. 그는 아내의 주검이 있는 장막에 와서, 그 시체 옆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그의 깊은 마음을 다 적시었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절망 속에서 통곡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은총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와 헤어진 죽은 사람들이나 남아 있는 우리들 모두에 대한 선한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아브라함은 장지 매입 문제 때문에 당면한 슬픔에서 잠시 마음을 전환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죽은 가족 때문에 너무 지나친 슬픔 속에 빠질 위험이 있다거나 또 그런 유혹에 빠져 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은 죽은 사람에 대해서만 생각한 나머지 혼자서 있다가 우울증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눈물을 그쳐야 하는 때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행복이 어떤 피조물의 생명 속에 갇혀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
-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준비도 없노라. 그리하여 장례할 수 있는 땅을 내게 팔기를 간청 하니라” 이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한 나그네요 순례자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 한 실례이다. 그는 자기가 그러하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히 11:13). 우리는 우리 친척들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영원한 안식의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아야 함을 명심하자.
-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소유한 최초의 땅이 매장지였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세상에 들어 올 때는, 이미 그 세상으로부터 떠날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자.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나자 마자 죽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가인이나 니므롯처럼 큰 도시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 장지만을 마련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후손에게 끊임없이 죽음을 기억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와 그의 후손들이 매일매일 죽기를 배우게 하기 위하여서이다. 이 매장지는 ‘밭 끝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9절). 우리의 소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소유의 끝에는 장지가 있는 것이다.
<창세기 24장 – 이삭의 결혼>
-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이 가나안 사람의 딸과 결혼해서는 안 되고, 그의 친척 중의 하나와 결혼하도록 준비했다. 그는 가나안 사람들이 타락한 것을 보았고, 계시를 통하여, 그들이 멸망할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 가나안 사람들의 영혼에 덫이 되거나, 혹은 그의 이름에 오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이 그들 중의 어떤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이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돌보아 주는데 있어서, 그들의 영혼의 복지와 그들이 하늘나라에 이르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세심하게 권면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 아브라함은 오랜 경험을 통하여 자기와 자기 가족에 충성을 다하고, 깊은 애정을 지니고 행동하는 착한 종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아마 그 종은 다메섹의 엘리에셀인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은 이 중대한 일을 이삭 자신이 아니라 그 종에게 맡겼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고향으로 보내지 않았고, 대리로 사람을 보내어 결혼을 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 아브라함은 인자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그의 종이 성공적으로 수행하도록 도와주시리라 믿었던 것이다(7절).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실제적인 은총의 부르심을 통하여 얼마나 놀라운 섭리 속에서 본토를 떠나 이곳으로 데리고 오셨는가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의 아들을 다시 그곳으로 데려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서 성공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언약하시고 확인하신 바 있는 약속을 기억한다. “그런고로 두려워 말라. 하나님께서 너의 길이 형통하도록 그 사자를 앞서 보내시리라.”
- 이삭은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는 이 일은, 그리스도의 종의 대리자들인 사역자들에 의하여 되어지는 교회의 결혼을 예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교회는 신부이니, 어린양의 아내인 것이다(계 21:9). 그리스도는 신랑이고, 사역자들은 그 신랑의 친구들이다(요 3:29). 그 친구들의 일은 모든 영혼을 설득하여 그리스도에게 중매하는 것이다(고후 11:2). 그리스도의 배우자는 가나안 사람이 아니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 즉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람이지 않으면 안 된다.
- 아브라함의 종은 이 일이 잘 되고 훌륭히 성공할 것을 간청하고 있다.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소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들이 낱낱이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하심과 돌보심에 따라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의 일이 순탄하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우리가 그처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했다면, 그 결과가 어떻든 우리는 의무를 다함으로써 오는 위로를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 또한, 종은 그의 주인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계약을 탄원하고 있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젊은 주인을 위하여 착한 아내를 마련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달라는 기도였다. 이것은 훌륭한 기도였다. 그는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잠 14:14).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자기 주인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유흥 장소나 공원에 가지 않았다. 또 그런 곳에서 주인의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다. 그는 우물가로 갔다.
- 종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속히 이루어졌다. “말을 마치지 못하여서”라고 했다(15절). 즉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사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한 것이 이루어졌다. 또 만족스럽게 이루어졌다. 물을 길러 나오는 것을 비롯해서, 모든 것이 그 종이 마음속으로 기대한 것과 똑같이 이루어진 것이다. 알맞은 반려자를 선택하기 위해 신앙과 기도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게 역사하시어 그들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행복한 결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행복한 결혼은 하늘에서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 마침내 이삭과 리브가는 행복하게 결합하였다. 이삭이 리브가를 만날 때 “그가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 혹은 기도하고 있었다”(62, 63절). 어떤 사람들은 이삭이 자기의 종들이 이때쯤 돌아오리라 예상하고 그들을 맞이하려고 들에 나갔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일, 즉 고요한 저녁에 외로운 들판에서 묵상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나간 것이라고 생각된다.
-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홀로 걷는다든지 홀로 앉아 있다든지, 홀로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고독과 참 경지에 들어서게 되면 우리는 조금도 외롭지 아니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홀로 있을 때에는 묵상과 기도를 즐거워해야 한다. 우리가 친숙할 수 있고 분명한 관계를 지닐 수 있는 하나님이 있고 그리스도가 있고 또 하늘 나라가 있다면, 기도나 명상의 제목이 결코 모자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