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9장 – 야곱의 예언>
- 야곱이 아들들에게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이르리라.”고 했다. 이 예언은 그들 후에 오는 자들에게 그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와, 거기 와서 정착할 때 그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고 그들의 길을 안내하는 데에 유용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에게 이 세상에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무엇이 일어날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에 따라 마지막 날에 그들에게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말해줄 수 있다.
-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로서 그의 아버지의 기쁨이었고 ‘그의 기력의 시작’ 이었기 때문에 그의 자랑이었다고 했다. 그가 그의 부모에게 얼마나 환영을 받았는가를 그의 이름이 말해준다. 르우벤, 즉 “한 아들을 보라”. 그에게는 그의 형제들보다 빼어난 품위가 있었고 그들을 능가하는 힘이 있었다. 그리스도 예수도 많은 형제들 중 장자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당연히 가장 빼어난 힘과 품위가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탄생한 그의 교회도 그와 마찬가지로 장자들이다.
-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악으로 안내한 그 야비한 욕망에 대한 증오를 나타낸다. “그들의 분노가 저주를 받으리라.” 그는 그들의 인격을 비난하지 않고 그들의 욕망을 비난한다. 우리는 사람 대신 죄를 사랑하거나 축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죄 대신 사람을 미워하거나 비난하지 않기 위해 항상 죄인과 죄를 구분해야 한다.
- 유다의 이름은 찬양을 의미하며, 그것에 대한 암시로 야곱은 말한다. “너는 네 형제들의 찬송이 될지라”(8절). 하나님이 그로 인해(29:35), 그에 의해, 그리고 그 안에서 찬양 받았다. 하나님에게 칭찬 받을 만한 사람들은 그들의 형제들의 찬송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유다 지파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성공한다. “너의 손이 너의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다.” 이것은 다윗에게서 이루어졌다(시 18:40). 실로가 이 지파에 속한다는 것. 그의 자손, 그 약속된 자손 안에서 온 세상이 축복 받으리라는 것, 저 평화롭고 번영하는 자, 또 어떤 이들이 번역하듯 구세주, 그가 유다에게서 올 것이다. 이와 같이 임종하는 야곱은 멀리 떨어져서도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고, 그것은 그의 임종에 위안과 격려가 됐다.
- 야곱은 가장 아끼는 아들인 요셉과 베냐민에 대한 축복으로써 끝맺으니, 이를 마치고는 숨을 거두게 된다. 아주 크고 충만한 요셉에 대한 축복. 그는 ‘열매 맺는 가지’, 즉 싱싱한 나무에 비유되니(22절). 이는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고난의 땅에서 열매를 맺게 하셨던 때문이다. 그가 열매를 얻었다(41:52).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역사에는 요셉에 관한 것이 야곱의 다른 어느 아들의 것보다도 많이 기록되어 있으니, 그러므로 야곱이 요셉에 관하여 한 말은 예언으로서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창세기 50장 – 두 죽음>
- 요셉은 아버지가 자기를 가나안에 묻어주도록 맹세로 남겨놓은 뜻을 이행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5절). 그것은 자만이나 기분에 따라서가 아니라 회피할 수 없는 의무에 대한 책임감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실로 그는 그것을 갈망하였다. 야곱은 돌아오기로 약속하였다, “내가 다시 오리라.” 우리들의 혈족의 시체를 땅에 묻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흔히들 “우리는 그를 뒤에 두고 왔다”고 하지만, 만일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집으로 갔다면 “그들이 우리를 남겨두고 떠났다”고 말해야 함이 더욱 옳을 것이다.
- 여기 야곱의 장례에 관한 설명이 있다. 유대의 왕들의 장례에 대하여는 대개 이런 한 마디 외에는 언급이 없다. “다윗성에 열조들과 함께 묻히다” 그러나 족장 야곱의 장례에는 보다 거창하고 많은 문구들이 묘사되어 있는 바, 하나님이 야곱이 기대했던 것보다 얼마나 더 그에게 은총을 내리셨던가를 보여주고, 그의 매장에 관한 부탁 내용은 성실하게 그리고 지상과 천국의 가나안을 기원하는 속에서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 형제들은 요셉을 경계하기 시작하였으니, 요셉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마음을 갖게끔 만든 것이 아니라 죄를 느끼는 마음과 용서하고 잊어버린다는 문제에 대해 자기들만이 가지는 부적응 의식은 그들에게 요셉의 호의에 대한 지속과 진지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15절).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리라” 아버지가 살아 있었을 때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안전함을 느꼈으나 그가 죽은 지금에 와서 그들은 요셉으로부터 닥쳐올 최악의 사태를 두려워하였다.
- 그들은 즉시로 뉘우치며 그들의 전과(前科)를 아뢴다. “죄를 용서하소서.” 그들은 요셉의 발 아래 엎드려 그의 처분에 맡긴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이것은 형제들의 자기에 대한 의심을 슬퍼하는 눈물이요, 그들의 복종에 대한 자비심의 눈물이었다. 그들에게 대답하는 가운데에 그는 형제들에게 회개하여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인도한다(19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 요셉은 자기의 신앙을 공언하여 저들의 신앙을 공고히 해 주기 위하여, 그들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게 될 그 날, 그 영광스런 날이 오기까지 자기를 애굽 땅에서 장례 지내지 말라고 당부했다(28절). 요셉은 자기의 유골을 가나안에 묻어 줄 것을 맹세하라고 했다. 애굽인들은 자기들이 위인들을 매우 귀중하고 화려한 예식을 갖추어 장례지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에서 장려한 장례식을 가지기 보다는 가나안에서의 의미 있는 장례, 그것도 근 200년이나 후에 이루어질 그런 장례를 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부활의 교회와 가나안 땅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써 “자기의 유골을 위하여 명령하였던” 것이다(히 11:22). 그는 애굽에서 죽는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정녕 이스라엘을 찾아오실 것이요,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실 것이라는 희망 속에다 자기의 유골을 물었다.
<출애굽기 1장 – 이스라엘의 창성>
- 여기서는 사도행전 7장 8절에 열거된 12 족장들의 이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의 이름은 성서에서 자주 반복되곤 한다. 이것은 그들의 이름이 번번히 반복되어 우리로 하여금 익숙하게 하기 위함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인이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 우리에게 가장 긴요하다고 여겨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친구들과 친척들을 우리에게 남겨 두시며, 또 그들이 없이 지내는 편이 더 좋게 될 때에는 그들을 떠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라고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요셉인 그리스도께서 죽은 후에 그의 복음적 이스라엘인들이 가장 현저하게 증가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는 바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과 같다(요 2:24).
- 이러한 놀라운 창성은 이미 오래 전에 그 조상들에게 하셨던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가 큰 민족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부르신 그때로부터 그의 자손들과 애굽으로부터 구원해 내신 그때까지 그 기간이 430년이었다. 전기에 속하는 215년 간의 그 증가는 불과 70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후반에 속하는 기간에는 이들 70명이 60만 장정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가 오랫동안 그의 약속을 그르치고 위배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 애굽 땅이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인들에게 행복한 안식처요 정착지였지만 드디어는 그들에게 속박의 집이 되고 말았다. 우리에게 만족을 주던 처소가 급기야는 우리에게 재난의 처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위로를 주리라” 하고 말하던 바로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가장 큰 십자가가 되기도 함을 명심해야 한다. 그 부모들은 진실한 친구였었으나 그들의 자녀들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기도 한다. 아니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던 바로 그 사람이 능히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서나 천국 이편에 있는 이 세상의 여하한 처소에서도 이것이 나의 영원한 안식이라 말하여서는 안 된다.
- 요셉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에게 혜택을 베풀어야 할 책임을 애굽인들은 잊어버렸다. 요셉 시대에 몇몇 계승자들이 거쳐간 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일어났다”(8절). 그들이 아는 모든 사람은 오셉을 사랑했고 그를 보아서 그의 친척들에게도 친절히 대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자 그는 곧 잊혀지게 되고, 그가 행한 선한 업적에 대한 기억마저도 사라졌거나 중히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하나님께 봉사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최대의 관심을 다해야 한다. 사람들이야 어떠하든, 하나님께서는 불의치 아니하사 우리들의 사랑의 행위와 수고를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히 6:10). 우리가 만일 사람을 위해서만 일을 행한다면 우리의 업적은 고작해야 우리가 죽을 때에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행한 일이라면 우리의 업적은 우리를 영원히 뒤따를 것이다(계 14:13).
- 바로는 그의 모든 백성에게 히브리인의 모든 남자 어린애들을 호수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렸다(22절). 이스라엘 남자 어린 아이의 출생을 알면서도 그를 강에 던지도록 지명된 자들에게 그 정보를 제공치 않는 자들은 큰 벌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교회의 적들은 “지극히 높이신 자의 성도들을 괴롭게 하기 위해” 쉴 틈도 없이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단 7:25). 그러나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을 비웃으실 것이다”(시 2: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