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장 – 모세의 출생>
- 모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레위인이었다. 야곱은 레위가 치욕의 상황에 처할 것을 예언했었다(창 49:5). 그러나 그 후 모세는 레위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이것은 허물 많은 육신의 모양을 입으시고, 우리로 인하여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파는 모세의 출생으로 다른 지파와 구별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괄목할 만큼 뛰어나게 되었다.
- 모세의 어머니는 그의 출생을 예상하고서 근심에 싸여 있었을 것이니, 살생의 법이 발효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태하지 못한 자가 복이 있도다” 하는 말과 같은 형편이 되어 버렸다(눅 23:29).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 내어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나았을 것이다(호 9:13). 그러나 이 아기는 후일 그 아비의 집에 영광이 되었다. 이와 같이 때때로 우리의 가장 큰 근심이 결국엔 우리의 가장 큰 기쁨으로 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하심을 보라. 바로왕의 포악함이 그 절정에 있을 바로 그 때에 비로소 구원자가 태어난 것이다.
- 발각된다면 부모들의 생명까지도 위험했지만, 그들은 ‘석 달 동안’ 모세를 자기들의 집 어떤 은밀한 방에 숨겨 두었다. 여기에서의 모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다(마 12:13). 즉 그리스도께서도 수많은 아이들이 학살당했을 때에 기적적으로 보호되었던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는 모세의 부모들이 그들의 “믿음으로 모세를 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떤 이는 그들의 부모는 구원자가 그들의 자손 가운데서 출생할 것이라는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들은 이스라엘의 보존에 대한 일반적인 약속을 믿었으며, 그 약속이 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행동하게 되었고,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은 왕의 명령을 두려움이 없이 거역해 가며 그들의 아기를 숨긴 것이다.
- 석 달이 다 될 무렵 숨겨진 어린애를 찾는 자들이 두루 돌아다니자 그들은 더 이상 그를 숨길 수가 없었으므로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가에 놓아두고’(3절) 그의 누이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게 하여 그가 어떻게 되는가, 누구의 손에 넘겨지는가를 살피도록 하였다(4절). 하나님은 그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이 일을 하게 하셨다. 즉 모세가 바로의 딸의 아들로 들어가게 하고 나아가 이 절박한 위험에서 그를 구하심으로써 지금처럼 버려진 하나님의 교회를 구원하리라는 실례를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이다.
- 멸망의 위험에서 모세는 구원을 받았다. 이 위대한 인물이 어렸을 적에 처해 있었던 곳을 와 보라. 그는 갈대 상자에 담겨 강가에 버려졌으니, 만일 그가 그 곳에 놓인 채로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곧 굶주려 죽었을 것이다. 그가 만일 물 속에 가라앉지 않았다면 악어에게 삼켜지고 말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어떤 다른 이의 손에 넘겨졌더라도 그들은 그를 곧 바로 강 속에 처박아 버렸을 것이리라. 그러나 바로 그 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의 공주를 이 불쌍하게 버려진 아기가 있는 곳에 인도하여 그를 불쌍히 여기게 하셨다. 우리는 모세처럼 버림받지는 않았을지라도 우리의 어린 시절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위험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그에게 감사를 드려야 마땅한 것이다(시 22:9, 10).
<출애굽기 3장 – 모세를 부르심>
- 모세의 생애는 크게 40년씩 셋으로 뚜렷이 대별될 수 있다. 그 첫 40년은 그가 바로 왕궁의 왕자로 지내던 시기요, 둘째 시기는 미디안에서 목자 생활을 하던 때이며 마지막 40년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던 시기다. 인간의 생애는 다 그렇지만, 특히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는 변화가 많은 것이다. 그는 이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라는 사명을 받음으로써, 제2차 40년 기간을 끝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이 계획하신 일을 위하여 그의 종들을 오래전에 부르시고 은총을 베풀어서 그들을 준비시킨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어떻게 그를 사용하셨는가? 모세는 호렙산 근처에서 양을 치고 있었다(1절). 양치는 일은 그의 신분이나 교육 정도로 봐서는 비천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만족하여 쉼을 얻으며 거기서 지극한 온유와 만족하는 것을 배웠다. 이것은 그가 배운 어떤 다른 학식보다도 그에게 큰 축복이 되었다. 위대한 일을 할 자격을 갖춘 자들이 때로 이름 없는 곳에서 유폐되어 지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지는 말아야 한다. 은둔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보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광경은 어떠했는가? 그는 놀란 표정으로 덤불이 타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을 때 크게 놀랐다. 그 불이 땅에서 나왔는지 하늘에서 내려왔는지는 몰랐으나, 불이 붙었는데도 수풀이 타 없어지지 아니함을 더욱 이상히 여겼다(2절).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나타내는 특별한 현현이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신 까닭이다. 이 불은 키가 크고 울창한 나무에서 나지 아니하고, 덤불 곧 ‘가시 덤불’ 에서 났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자와 멸시받는 자들을 택해서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자들을 훌륭하게 하고 면류관을 씌우시기를 기뻐하신다.
-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사명(10절)이 나타나 있다. 모세는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조속히 구원받을 것을 확신시켜야 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자로 보내졌을 뿐 아니라 바로와 협상하는 하나님의 대사로 애굽으로 보내졌다. 또한 모세는 왕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졌으니 그들을 지휘하고 명령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시 78:71) “양의 우리에서 취하여 내어” 보다 훨씬 더 고귀한 목자의 직분을 맡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힘의 근본이시며,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 그 힘을 부여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사막에서 한 목자를 부르시어 유대교의 창시자로 만드신 그 손길이 후일에는 어부들을 부르시어 그리스도의 교회를 창시하시는 데에 하셨다. 그러므로 뛰어난 권능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 모세는 자기가 부름받은 사명에 “내가 누구입니까?”라고 자신의 부족을 내세워 이의를 제기했다(11절). 하나님은 이 이의에 대해 응수하신다(12절). 하나님은 친히 모세와 같이 하겠노라고 그의 임재를 약속하셨다.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면 충분하다. 그 자신으로서는 연약한 지경에 처한 자들도 주 안에서는 강건하여지고, 그의 능력 안에서 힘을 얻을 때는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유의하자. 하나님의 임재는 보잘 것 없는 자에게 영예를 안겨 주며, 연악하고 우둔한 자에게는 지혜와 힘을 주며, 아무리 큰 어려움조차도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이의에 대하여 충분한 해답이 된다.
-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I am that I am) 그는 자존자(自存者)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존재케 하신다. 다른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선한 사람일지라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자존자이시기 때문에 자족(自足)하시는 분이시며, 그러므로 또한 모든 것에 넉넉하신 분이시다. 또한 영원히 다함이 없는 존재와 축복의 원천이신 것이다.
<출애굽기 4장 – 모세를 세우심>
-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위하여 모세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그에게는 매우 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 사명을 수락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마침내는 몹시 망설이면서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세가 이의를 제기한 것은 아마 백성들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 때문임이 분명하다. 즉 그들은 그가 어떤 기적을 보이지 않는 한, 그의 말만은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이의는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3:18)라고 하신 말씀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들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모세의 말이 이뤄지겠는가!
-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지팡이가 기적의 도구가 되었으니, 그것을 땅에 던지매 뱀이 되었고, 다시 잡으면 곧 지팡이가 되었다(2-4절). 그 기적 자체 속에는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 바로는 그 위험을 주었고(1:10), 배로 티끌을 헤치고 다니게 하였으며, 그들의 파멸을 도모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 뱀이 다시 지팡이로 되었다. 또 바로는 권력의 지팡이를 가지고 모세를 미디안으로 도망하게 만든 압제의 뱀이 되게 했었다. 그러나 모세의 역사로 그 장면은 다시 뒤바뀌었다.
- 그런데 모세는 자신이 말에 능치 못함을 호소하였다.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니이다”(10절). 하나님은 때로 기교와 천성이 별로 뛰어나지 않은 자들을 그의 사자로 선택하시기를 즐기시니, 이는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영화롭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그들을 웅변가로 만드시기까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웅변가는 아니었다.
-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으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모세는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이제 다시금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을 지으신 것을 상기했다. 창조주 하나님의 눈동자는 우리들이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 중에 당하는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우리를 도와 주시고자 하신다(시 124:8). 창조주 하나님은 말의 능력과 재능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리고 은사와 모든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말을 잘할 수 있는 재능이 나온다. 곧 ‘구재(口才)와 지혜’를 주시고(눅 21:15) ‘학자의 혀’를 주신다(사 50:4). 그는 입술 위에 은혜를 베푸신다(시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