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5장 – 바로 앞의 모세>
-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그들의 메시지를 전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던 모세와 아론은 이제 바로와 담판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생명을 건 위험한 일이었다. 특히 40년 전에 애굽인을 죽인 범법자 모세로서는 만약 늙은 대신들 중의 누구 하나라도 그 사실을 알고 문제 삼는 자가 있다면, 그의 목은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전할 메시지 그 자체가 분명히 바로를 불쾌하게 하고 성나게 했으니, 그것은 그의 명예와 그의 이익이라는 두 가지 점에 있어서 다 같이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신실한 사자들은 바로가 듣든지 안 듣든지 담대하게 그것을 전하였던 것이다.
- 그들은 신앙으로 담대하게 요구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하셨다”(1절)고 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담론할 때에는 하나님을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이라고 칭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바로와 담론할 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였다. 하나님을 이렇게 칭하는 것이 성경 중에서는 이곳이 처음이다. 창세기 33장 20절에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불리워졌으나, 거기서의 이스라엘은 한 개인 즉 야곱을 가리켰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스라엘이라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려질 때에, 그 때에 그들은 이미 한 백성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 “나의 백성을 가게 하라.”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그러므로 바로가 그들을 계속 속박으로 억류시킬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비록 가난하고 천한 백성이라도 그들의 탄식을 들이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스라엘인들은 애굽의 종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백성이다. 나는 그들이 항상 고통 당하게 버려 두지만은 않을 것이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사 53:4, 5 참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와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애굽인들의 간섭없이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곳으로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그들의 대적의 손에서 구하여,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섬기되 기쁜 마음으로 섬기게 하신다.
- 바로는 얼마나 거만에게 말했던가! “내가 그의 말을 들어야 하다니! 위대한 민족 애굽의 왕인 내가 비천한 노예 민족인 이스라엘의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인가? 안 된다. 그것은 나를 격하하는 일이다. 나는 그의 요구를 비웃으리라”고 했다. ‘불 순종의 아들들’ 은 교만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기억에서 두자(욥 41:34; 엡 5:6). 즉 하나님은 인간을 지배하셔야 하지만 인간은 지배받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나의 뜻을 행하리라”고 하시나, “그러나 나는 내 고집대로 하리이다”라고 죄인들이 말한다.
- 하나님은 때로 매우 이상한 절차를 밟아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깨닫자.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막 나타나실 준비를 갖추고서도, 바로 그 때에 그의 백성들을 가장 어려운 길로 인도하신다. 큰 만조가 되기 전에 간조가 온다. 안개가 많이 낀 아침이 온 후 청명한 날이 된다(신 32:36).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그 때는 만사가 최악의 상태에 놓일 그때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외적 사태가 나쁘면 나쁠수록 더욱 좋다는 역리적 사실을 입증하신다.
- 모세는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와 만나 이 사정을 고하였다. 모세는 자기가 말한 것과 행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지시대로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때문에 자기가 비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비난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히스기야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그에게 호소했다. 이것을 예레미야 20장 7-9절과 비교해 보라. 우리가 만일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다가 곤란과 좌절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그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앞에 모든 사정을 아뢰어 충심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물러나야 될 경우에는 하나님께로만 물러나자. 결코 다른 길로 가지 말자.
<출애굽기 6장 – 해방의 약속>
- “그 후에 그가 너희를 보내니라”(3:20)는 약속을 여기서 반복하시고 확인함으로써 그 일이 성취된다는 것을 모세에게 확신시킨다. 이로써 하나님은 모세의 불평을 진정시킨다. 모세가 애굽으로 갔으나 일은 오히려 악화되고, 모세는 이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미디안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때에, 곧 그가 자기의 할 바를 도무지 모르고 있던 때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루신’ 사실은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제 내가 바로에게 가서 행한 바를 너에게 보여 주리라”(1절). 사태는 이제 위기에 직면하였고 만사는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바로의 교만은 극에 달했고, 이스라엘인들은 슬픔이 심연에 달했었다. “이제 내가 나타날 때가 되었느니라.” “내가 이제 일어나리라” (시 12:5 참조). 인간에게 극단적 상황은 하나님께서는 도우시고 구해 주시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알아 두자.
- 모세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는지 이제까지 기대만 해 왔으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모세가 보게 될 것이다. 마침내 주의 날을 보게 된 것이다(욥 24:1). 모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힘을 다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자! 너는 내가 하는 일을 보게 되리라. 내가 이 교만한 자를 상대하는 것을 두고 보라”(욥 40:12, 13).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역사하실 그 때에야 교회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자. ‘강한 손으로’ 즉 권능의 손으로 강압하여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의 날에 기꺼이 사명을 다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강권으로 인하여 자기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게 되나 하나님께 굴복하려 하지 않던 자들은 하나님의 정의의 강권으로 멸망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 여호와란 하나님의 이름 자체에서 위안을 받으라(2,3절).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즉 존재와 축복의 근원이요 무한한 완전자라는 뜻을 지닌, “나는 여호와로다”라는 말로써 시작하고 있다. 족장들은 이 이름을 알고 있었으나, 이 이름이 의미하는 뜻은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이제 그의 이름은 여호와라는 것이 알려지기를 원하셨다. 그 뜻은 다음과 같다. 그는 약속한 바를 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고무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는 시작하신 것을 완성하시며, 자신의 일을 끝내시는 하나님이다. 창조의 역사에 있어서도 하늘과 땅이 다 만들어지기 전은 하나님이 결코 여호와라고 불려지지 않았다(창 2:4). 성도들의 구원은 영생 속에서 완성될 그 때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여호와로 알려지기를 원하신다(계 22:13). 그러므로 그들은 어려운 때에 힘과 의지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된다.
- 이것은 그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함이었다. “내가 너희를 빼어 내리라. 그 노역을 면케 하리라. 너를 구속(球贖)하리라. 내가 너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너희에게 주리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반복해서 말해야 했던 인간의 불신앙을 우리는 부끄럽게 여기자. 하나님 자신이 당신을 낮추시는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에게 만족할 만한 확신을 주시려고 그렇게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그에게 영광을 돌리자. 하나님은 그 백성을 행복케 하리라고 작정하셨다. “나는 너희를 내 백성으로”, 곧 특별한 민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이보다 더한 무엇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 자신의 영광을 드러 내시기로 작정하셨다. “너희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계시니, 우리도 그것을 우리 자신의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면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출애굽기 7장 – 하나님의 기적>
- 하나님은 모세에게 큰 권능과 권위를 부여해 주셨다(1절).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리라.”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대리자들이기 때문에 그의 일을 하는 모세와 아론을 ‘신’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를 대신하고 그의 지시를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는 권위를 받았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 군주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불응하면 처벌했던 것이다. 모세는 신이었다. 다만 그의 사명에 대해서만 신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단지 바로에게만 신이었다. 그러나 살아 계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은 온 세계에 대해서 신이시다.
- 하나님은 모세에게 최악의 사태를 일러 주었다. 즉 바로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나 필경은 그 일이 성취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해방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했다(4,5절). 여호와를 알지 못하던 애굽인들도 그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했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비록 그들이 갖은 충돌과 반대에 부딪치더라도 결국에는 그들의 주장이 관철되어 만족을 얻게 되며, 또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의 사자들의 일이 성취됨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며 선택받은 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헛되이 수고하였다는 말은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 모세가 처음으로 바로를 대했을 때는 하나님의 지시만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제는 기적을 행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바로가 모세 일행에게 기적, 곧 초자연적인 일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도전할 것은 당연지사이다. 바로가 “기적을 보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가 확신을 얻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그들이 아무 것도 못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불신앙에 어떤 구실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가르치심대로 지팡이가 뱀로 변하게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4:3). 다른 기적들을 일으키는 신호를 하기 위해 주어진 그 지팡이 자체가 지금은 기적을 일으키게 되어 지팡이는 신망을 더하게 되었다.
- 그리하여 술객들이 불려나와 그와 대결하게 되었다. 그들의 지팡이도 뱀, 곧 실제의 뱀이 되었다. 하지만 이 대결에서는 모세가 명백히 승리를 거두었다. 아론의 지팡이가 변하여 된은 뱀은 다른 뱀들을 다 삼켜 버렸다. 이것은 바로가 어느 것이 참인가를 보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진리는 위대하며 언제나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뜻이 결국 모든 싸움과 분쟁을 이기는 것이 명백하니, 홀로 그의 뜻만이 이뤄질 것이다(단 2:44).
- 열 재앙 중의 첫째는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이었다. 인생의 평안을 위해 절대 필요한 물이 그렇게 값이 싸고, 또 어디에서나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우주의 섭리자 하나님께서 명하신 지혜와 자비의 덕분이다. 그런데 이제 애굽인들은 피를 마셔야 될 형편이며 그렇지 않는다면 갈증으로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고기가 그들의 주요 양식이었는데(민 11:5) 물이 변함으로 고기마저 죽어 버렸다. 노아의 대홍수에도 물고기들은 죽지 않았다. 아마 그 홍수 때에는 물고기들이 인간의 죄악과 사치에 지금처럼 크게 이용당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이 특정한 심판으로 고기들이 멸절당했다.
- 그것은 애굽인들에게 내려진 정당한 재앙이요 그들의 고통은 당연할 것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애굽의 나일강은 그들의 우상이었다. 그들과 그들의 땅은 나일강에서 많은 혜택을 입고 있으므로,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보다도 이 나일강을 더 예배하고 숭상하였던 것이다. 나일강의 참 근원이 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그 강물에다가 그들의 전적인 예배를 드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사 그들이 신으로 삼던 그 강을 피로 변하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우상으로 삼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의당히 우리에게서 제거하시든가, 그것이 우리에게 고통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알아두자. 그는 우리와 하나님과 경쟁거리로 삼았던 그것이 우리에게 채찍이 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