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31장 – 히스기야>
- 여기에서 유월절 후에 어떤 일이 행해졌는가를 읽을 수 있다. 이전에 유월절 의식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부족했던 점들이 이제는 많이 개선되어 더 훌륭하게 채워졌다. 여호와의 날의 예배 의식이나 교제가 끝났다고 해서 우리는 그 사업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때부터 우리의 고된 일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거룩한 교제 가운데 우리 마음에 미치는 예배 의식의 영향을 예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이 모든 의식이 끝났을 때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상 숭배의 모든 유물을 파괴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1절). 왕은 이전에는 그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러한 일을 했었다(왕하 18:4). 그러나 백성들은 왕의 일꾼들의 눈을 피해 숨겨졌던 불경건한 이 유물들을 더 잘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1절). 이 일은 유월절 후에 즉시 행해졌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눈 기쁨은 우리의 믿음에 대해 거룩한 열의를 품게 하고 죄악과 하나님을 거스리는 모든 것들에 대한 분노를 불붙게 해야 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만일 예배 가운데 있는 우리의 마음에 불이 당기게 된다면 타고 있는 영혼은 타락한 쓰레기들을 태워 없애 버릴 것이다. 이제 “내가 우상들과 더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주상과 목상’, ‘산당과 단’을 멸하기에 이른 그들의 열성은 다음과 같은 곳에서도 나타나 있다. 그들은 유다와 베냐민에서 뿐만 아니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에서도 이 일을 행하였다. 이 성읍들은 유다 왕의 보호와 관할권 아래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견해를 달리한 어떤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왕 호세아가 그것을 금하지 않았으므로 열의에 충만되어 있던 그들이 그의 나라에 속해 있는 우상들까지도 파괴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적어도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온 자들은(많은 사람들이 왔다. 30:18)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주상과 목상을 파괴시켰고, 그들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들도 그렇게 하도록 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바로 잡아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역시 그렇게 되도록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들은 온 땅을 멸하였다. 그들은 그 상들이나 그들이 섬기던 것들에 대한 호감이나 애착 때문에 그것들을 남겨 두려 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것들이 오래되고 비용을 들여 아름답게 만들어지고, 또 잘 수호되어져 왔더라도 그것들은 모두 파괴되어야 한다. 성실하게 죄악과 대결하는 자들은 모든 죄악과 대결할 것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지만 이것이 다 행해지기 전에는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마을을 배반하고 멸망하게 하는 이 주상과 목상들이 남아 있는 한 마음이 편안할 수 없었고, 또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선지자 이사야가 얼마 전에,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만든 그 우상을 버리게 될 날에 관해 말한 것은 아마도 이것을 가리킨 것일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축복된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사 2:20, 31:6, 7).
- 히스기야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반차를 복귀시켜 그 직임대로 행하게 했다. 이것은 다윗이 정해 놓았으나 최근엔 행해지지 않고 있었다(2절). 성전 의식은 오랫동안 행해져 왔던 합당한 방법으로 다시 행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일과, 직책, 차례, 그리고 각자에 대한 요망 사항 등을 알도록 했다. 훌륭한 일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는 반드시 훌륭한 진서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제사장들은 반차를 정하여 ‘번제와 화목제’ 를 드리도록 했다. 그리고 일부 레위인들은 그들의 반차대로 제사장들을 시종들고 또 다른 레위인들은 감사하며 찬성하도록 했다. 역대상 23장 4, 5절을 보라. 이들은 모두 ‘여호와의 영문’ 에서 혹은 ‘뜰’ 에서 섬겼다. 여기서는 성전을 성막으로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성전의 특권이란 가변적인 것이며, 또한 이 성전은 곧 없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는 자기 재산의 일부를 제단의 유지와 후원을 위해 충당하였다. 매일 재물을 바치고, 안식일, 월삭 그리고 절기마다 제물을 바치는 것은 백성들에게 주어진 책임이었지만 그는 백성들에게 이 짐을 지우려 하지 않고, 그 스스로가 그의 소유나 재산을 이 제물을 위해 바쳤다(3절). 그가 하나님께 충성스런 종으로서 그리고 백성들에게 온화한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의 편리를 모두 고려했다는 것은 너그럽고 경건한 행위였다. 방백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들 나라의 믿음을 더욱 북돋우고 격려하기 위해 내어 준 것이 자기들의 잘 받은 것이요, 또 자기들에게도 최상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에게 명을 내렸다(4절)(성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이들이 모아둔 것을 제단에 바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은 후에 유다 여러 성읍에까지 퍼졌고 혹은 적어도 그들의 동의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율법대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그들의 몫을 신중하게 바쳤다. 이것은 오랫동안 소홀히 다루어졌으므로 사람들이 이 일을 무시하게 되었던 것이다(수치스러운 재정 유지는 수치스러운 일꾼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색하지 않은 히스기야는 이렇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줌으로써 신하들로 하여금 이 성전 일을 올바로 행하도록 요청할 수 있었다. 그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배당 몫을 주는 제도를 복귀시킨 목적은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고 그것을 연구하고 그것에 따라 그들의 의무를 이행토록 하기 위한 것에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성직자들은 재정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격려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들의 일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행할 수 있도록 어디서나 편안히 살게끔 만들어 주어야 한다.
<역대하 32장 – 산헤립의 침입>
-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왕국을 치려는 거대한 야욕을 품고 침입해 왔다. 이 산헤립은 그 후의 느브갓네살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그 이웃나라에 매우 두려운 압제자로서 그들을 괴롭혀 왔다. 그는 그 이웃나라를 모두 파멸시켜 그 스스로 거대한 군주가 되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의 조상 살만에셀도 근래에 이스라엘 왕국의 주인이 되어 열 지파를 포로로 사로잡아 간 일이 있었다. 산헤립도 이와 같이 스스로 유다를 얻고자 했다. 교만하고 야망에 찬 자들은 온 세계를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 이 후에 땅 위에 있는 왕들을 지배하게 된 로마가 바로 이 시대에 로물루스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은 기억해둘 만한 일이다. 산헤립이 유다를 침입해 온 것은 유다가 믿음을 바로 잡아 모든 종교적인 제도를 재정비한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 그가 유다로 들어왔다”(1절). 유다가 개혁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침입해 들어와 그것을 이루지 못하게 교란시키지 않도록 해 준 것은 그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아마도 산헤립은 그 자신이 섬기는 우상을 파괴한 히스기야를 징벌하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히스기야가 행한 일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보고 이제 그가 거룩한 보호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그는 히스기야를 쉽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먹이로 여겼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마음을 바로 잡은 이 백성들을 위하여 강한 힘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이 때에 이러한 일을 명하셨을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이 영예를 얻고 또한 그들을 영예롭게 구원해 주시고자 그들에게 이러한 괴로움을 주셨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는, 아마도 이들이 완전한 평화를 누리며 아무도 이 거룩한 은총을 입은 백성들을 감히 괴롭히려 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그 후에 접한 소식은 적군이 엄청난 힘으로 침입해 와 그 나라를 온통 황폐하게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행하고 있는 동안에도 환난과 위험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확신을 갖고 있는가를 시험하시고 그가 우리를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해 그러한 것들을 명하신다. 산헤립은 유다로 들어갔을 때 별 저항을 받지 않자, 이 모든 것이 그의 것이 되리라고 상상하게 되었다
- 히스기야는 그를 위협하는 이 폭풍우를 대처해 나가기 위해 신중한 준비를 해 두었다. 그는 어떻게 행해야 하며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하는가를 방백들과 더불어 의논하였다(3절). 그리고서 그는 다음과 같은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즉, 그는 산헤립으로 하여금 그의 나라에서 물을 찾지 못하게 하거나(그렇게 되면 그의 군사들은 갈증으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물이 모자라 군사들이 기운이 쇠하여져 싸우지 못하도록 그들에게 불리 환경을 만들어 놓도록 했다.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며칠간만 물이 부족하게 되면 건초 더미와도 같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즉시 물의 근원과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았다. 아마도 그들은 이 물줄기를 지하관으로 연결하여 성읍으로 돌렸을 것이다. 이것은 침입한 군사들을 멸하기 위해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전술이다. 성읍은 산헤립에게 뜨거운 환영을 보내기로 했다. 이것을 위해 그는 성을 중수하고 망대를 높이 쌓았으며 병기와 방패를 많이 만들었고(5절) 또한 장관들을 정했다(6절). 이와 같이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 알맞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는 그에게 의탁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은 준비를 갖추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또한 준비해야 한다. 히스기야는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 환난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그들을 광장으로 불러 모으고 말로 위로하였다(6절). 그는 이 침입이 잘 해결되리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죄의식으로 가득 차 믿음의 위로도 받지 못한 자였다. 나라 안에 위험이 닥쳤을 때 “그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과 같이 흔들렸었다”고 하니 그 백성들의 마음도 그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사 7:2).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의 아버지와는 달랐다. 그는 백성들과 특히 장관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말을 들려주었으며, 말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그는 그들의 두려움을 진정시키도록 노력했다. 하나님의 선지자도 위로했다. 이제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나(사 33:14), 의로운 자는 높은 곳에 거하면서(사 33:15, 16) 그들을 두렵게 하여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을 묵상하였다.(사 33:18 참조) 히스기야는 그들에게 믿음을 불어 넣어 그 두려움을 진정하고 극복시키고자 노력했다. “산헤립은 그를 좇는 온 무리를 가지고 있으나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저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거늘 우리의 힘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 우리의 적이 의지하는 것은 육신의 팔이지만 우리와 함께 하는 자는 여호와시다. 우리 하나님의 권능은 대적할 수 없으며, 그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 우리와 언약을 맺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다. 즉 그는 그들과 싸우는 우리를 도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꺼이 그들과 싸워 주실 것이다.” 이 말은 그대로 행해졌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확신을 지닌 자들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학대자의 분노를 두려워하는 자는 그의 창조주를 잊은 것이다”(사 51:12, 13). 아마도 히스기야는 이 의미를 좀더 상세히 말해 주었을 것이며 이에 백성들은 안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즉 그의 말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구원하실 권능을 베푸실 것을 확신하게 됨으로써 마음을 놓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종들과 병정들은 그의 말씀 가운데 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거늘 어느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역대하 33장 – 므낫세>
- 여기에서는 므낫세가 매우 사악하게 행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여기에 나온 구절은 열왕기 하 21장 1절부터 9절까지의 내용과 거의 같은 것으로서, 우울한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다시 이 이야기를 살핀다는 일은 그리 유쾌한 일이 못될 것이다. 이 어리석은 젊은 왕은 그의 아버지가 가르친 선한 교육과 본보기를 거역하고, 불경스러운 것에 몰두하였으며 가증한 이방 나라들을 따랐다(2절). 그리하여 그는 견고히 세워진 믿음을 멸하고 그의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영광스러운 개혁을 더 이끌어 나가지 못한 채(3절), 하나님의 전을 우상 숭배로 더럽혔다(4, 5절).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자녀들을 몰록 신에게 바쳤고, 마귀의 거짓된 신탁을 그의 길잡이와 모사로 삼았다(6절). 그는 하나님께서 시온 땅을 그의 영원한 안식처로 하셨고 이스라엘을 그의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며(8절), 그 자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전을 더럽혔고 그 선택하신 백성들을 타락시켰다. 그는 그들을 꾀였으며 열방보다 더욱 심한 악을 행하였다(9절). 그것은 마귀가 다시 돌아올 때는 그보다 더 악한 다른 일곱 마귀를 데리고 오기 때문이었다. 므낫세가 지은 더 큰 죄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그와 그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저희는 듣지 아니하였다”(10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충고해 주신 그 은총에 대해 감탄하게 될 것이다. 결국 그들은 고집스럽게 귀를 막아 버렸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들려 주신 것은 그들이 악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선하심을 거두지 않으시고 그들이 마음을 돌리기를 은혜롭게 기다리시려 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선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악을 버리려 하지 않고 다시 돌아오기를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믿음이 두터운 부모들의 자손들이 그들이 배운 대로 하나님의 선한 길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매우 슬픈 일이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선한 것들을 많이 줄 수는 있어도 그들에게 은혜를 줄 수는 없다. 믿음의 타락은 곧 치유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곧 재발하기 쉬운 교회의 병이다. 이 세상의 신은 인간 마음을 교묘하게 속이고, 그의 포로가 된 자들에게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그렇지 않고는, 그가 인간의 가장 훌륭한 친구인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을 끌어내어 그들의 숙적에게 의지하도록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 앞에서 므낫세가 그의 아버지의 선행을 본 받지 않고 사악하게 행한 것을 보았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는 그가 회개하여 이전에 행하던 악을 좇지 않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열왕기에서와 같이 그의 악한 행적이 많이 언급되어 있지도 않고, 열왕기와는 반대로 그가 죄를 계속함으로써 멸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이 열왕기의 의도가 그들의 멸망을 초래한 이교도국의 사악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므낫세의 회개와 그에 대한 은혜가 중요시되지 않은 것은, 그 일이 국가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개인적인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용서해 주시는 자비의 풍성함과 새로운 은혜를 더 하시는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써 상세히 다루고 있다. 므낫세가 회개하게 된 것은 그의 환난 때문이었다. 므낫세는 환난을 당했을 때(아하스왕과 같이) 하나님께 더 이상 범죄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교만함을 꺾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성결화된 환난은 흔히 전향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11절에서 그의 환난에 대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의 군대로 하여금 그를 치게 하셨다. 즉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던 므낫세의 아버지에게 아첨을 했었던 바벨론 왕은, 이제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난 므낫세를 침입했던 것이다. 바벨론 왕이 여기에서는 앗수르 왕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는, 산헤립의 군대가 패하여 예루살렘 앞에서 격파되면 보다 쉽사리 앗수르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자였다. 그는 그의 신복들이 모아둔 보물과 모든 귀중품들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내시어 죄악에 빠진 백성들을 징벌하고 빗나간 왕을 굴복시키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 장관은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므낫세를 잡았다. 이 가시나무는 그가 숨어 있던 그의 정원을 가리킬지도 모르지만, 그의 계획의 혼돈과 일에 대한 당황함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는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가시방석에 앉아 빠져나갈 길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쉽게 앗수르 장관들의 먹이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왕하 20:17, 18) 그의 집을 약탈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간 것은 물론이다. 교만한 히스기야는 그들의 먹이였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저지른 죄의 끈으로 묶여 있던 므낫세를 잡아 바벨론으로 포로로 데려 갔다. 이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적혀 있지 않으나 유대인들은 이 일이 그가 왕위에 오른지 이십 이년 만에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