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34장 – 요시야>
- 여기에는 요시야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그가 왕 위에 오른 때는 매우 어린 나이로 단지 여덟 살에 지나지 않았으며(그러나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그의 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매우 오랜 기간인 삼십 일년을 다스렸다(1절). 그러나 나는 그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일을 맡겨야 했기 때문에, 그가 다스린 초기에는 그의 아버지가 다스리던 때와 마찬가지의 상황이 되지 않았었는가 염려된다. 결국 그가 개혁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12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3절). 그는 히스기야처럼 즉시 그 일에 착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매우 훌륭히 다스렸다(2절). 그는 하나님을 시인했으며 다윗의 길을 좇았고 좌우로 치우침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 양쪽에도 모두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열 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였다(3절). 우리는 그가 므낫세와 같이 훌륭한 가르침을 받지 못했으리라는 것을(므낫세와 같이 타락한 자들이 그를 교육하여 망치지 않게 된 것은 잘된 일이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때 이와 같이 하나님을 구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을 구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인 동시에 이익이 될 수 있고 특히 젊은 신사들의 영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일찍 구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즉위한 지 12년째 되던 해(아마도 이 때는 그가 모든 통치를 그의 손으로 해나갔을 것이다), 그는 그의 나라를 비로소 정결케 하여 남은 우상들을 제하였다. 즉 그는 산당과 목상들과 우상, 제단, 그리고 우상의 모든 기구들을 훼파했다(3, 4절). 그는 므낫세처럼 그것들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부수어 가루로 만들었다. 그가 우상을 훼파하기 시작한 때가 여기서는 그가 즉위한 지 12년째 되는 해라고 적혀 있으나, 열왕기 하 23장 23절에는 18년째 되는 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그는 12년째 되는 해부터 이러한 일들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즉 그때도 그는 우상을 제하는 일을 시작했으나 이 선한 사업은 반대에 부딪쳐서, 6년 후 율법 책을 발견할 때까지는 완전히 행해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열왕기에 특별히 그리고 폭넓게 언급되어 있는 것을 간단히 기록해 놓고 있다. 그의 열의가 그로 하여금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읍 등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곳에서 이러한 일을 행하도록 했던 것이다.
- 그는 성전을 수리하도록 명했다(8절). 그가 더럽혀졌던 성전을 정결하게 했을 때 그는 그곳에서 행해야 할 성전 의식을 위한 일에 착수했다. 이처럼 우리도 마음에 있는 영적인 성전에 의해 행해야 하며 죄로 더럽혀진 것을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 요시야는 이러한 명령을 내릴 때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 여호와’라 부르고 있다. 성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전에 거하기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 일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였다. 레위 사람들은 성읍을 돌아다니며 성전을 위한 돈을 거두어서, 이것을 8절에 언급된 세 사람의 보관인에게 주었다. 그들은 그것을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주었고(9절), 이것은 다시 공장들의 손에 넘겨졌다.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나 일하는 자나 모두 그 일에 크게 혹은 대량으로 착수하였다(10, 11절). 공장들이 근면하고 정직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즉 그들은 진실히 그 일을 하였다(12절). 만약 일하는 자들이 신중하고 부지런하지 않다면 그들은 완전히 성실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이 근면하고 정직했기 때문에 신임을 얻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감독관들은 독창적인 자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일을 감독하는 자들은 음악에 익숙한 자라고 적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음악에 재주가 있었다는 것이 건축하는데 유용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재치있고 독창적인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었다는 말이다. 특히 그들은 수학에까지 재능이 있어서 이 일을 맡을 만한 자격이 충분했다. 재치있는 자들은 선한 일이나 친구를 돕는 일이나 또한 공적인 일을 맡을 기회가 주어져 그들의 재치를 사용하게 될 때는 슬기로운 자들이 된다. 이 일에서 얼마나 다양하게 하나님께서 그의 선물을 분배하시는 가를 관찰해 보라. 즉 담부하는 자들은 육체적인 노동을 하기에 적합한 자들이었다. 또한 서기관이나 관리가 된 자들도 있었다. 전자의 사람들이 손이었다면 후자의 사람들은 머리가 되었다. 그들은 서로가 필요했으며 일하는 데는 이 두 종류의 사람이 모두 필요했다. 일을 감독하는 자들은 담부하는 자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또한 직접 노동을 하는 자들은 그들을 지시하는 직책을 맡은 자들을 시기해서는 안 된다. 서로 사랑으로써 존중해 주며 섬기도록 해야 한다. 서로 다른 은사와 기질의 혜택을 하나님 교회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자.
<역대하 35장 – 유월절 회복>
- 요시야가 우상과 우상 숭배를 멸한 일에 대해 열왕기에서는 크게 다루어져 있으나, 여기에서는 단지 34장 33절에서만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열왕기 하 23장 21절에서 간단히 언급한 유월절 의식 거행에 관한 기사는 여기에 매우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의식상에 율법에 의해 정해진 많은 제전이 있으나, 그 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것은 유월절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부터 나온 날 밤부터 이 모든 것은 시작되었으며 그리스도가 배반당하신 날 밤에 이 모든 것은 끝났다. 이러한 축제 가운데 두 위대한 개혁자,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그들의 통치 시절에 믿음을 복귀시켰다. 여호와의 만찬 의식은 어느 유대인의 축제들보다도 유월절과 비슷하다. 이러한 의식을 규례대로 준수한다는 것은 교회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더욱 성장케 하고 각 그리스도인의 경건과 헌신을 날로 커지게 하는 본보기이며 수단인 것이다. 유월절을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규례대로 준행하지 않는 곳에서는 믿음이 장성할 수가 없다. 이러한 감동적이고 의무적인 의식으로 눈을 돌려, 그것을 복귀시키고 엄숙한 사업으로 삼은 후에야 또 다른 면에서 개혁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 히스기야의 유월절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백성들이 매우 그것을 성심으로 준행하였고, 또 그들 모두가 깊은 믿음 가운데 있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와 같은 분위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이 모두 유월절을 지킨 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원했기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왕의 뜻에 응하려는 것 때문이었다(17, 18절). 그들은 이 거룩한 일을 행하는 데에 얼마만큼의 자만심은 느낄 수 있었어도 그 안에 있는 권능의 기쁨은 누리지를 못했다. 그러나 의무를 행하는 마음가짐에 있어서 백성들이 어떠한 잘못을 지니고 있든지 간에, 장관들과 제사장들은 그 의식의 형식이 규례대로 엄숙히 행해질 수 있도록 그의 역할을 하였고 책임을 다 하였다.
- 왕이 유월절을 위한 제물을 바치는 것을 보고 방백들도 관대하게 그들의 몫을 바쳤다. 예배 의식은 비용이 많이 들었는데 이것이 아마도 그 일을 등한시하게 된 한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또한 백성들은 그들의 몫을 바칠만한 열의도 없었고 따라서 흥미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그 자신의 비용으로 유월절 양들과 그밖의 것들을 마련하여 회중에게 주어 칠일간 열리는 잔치에 쓰도록 했다. 그는 자기의 소유 중에서 제물을 바치는 자들이 먹도록 되어 있는 양 삼만을 유월절 제물로 주었고 또 연하여 칠일 동안 있을 무교절을 위해 수소 삼천을 내 주었다(7절). 믿음이 깊은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도록 권면할 때 될 수 있는 한 그들의 부담을 가볍고 쉽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풍성히 씨 뿌리신 곳에서 그에 따른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신다. 일반적으로 회중이 제물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만일 요시야가 그것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일은 결국 행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들의 직책을 매우 손쉽게 이행했다(10절). 그들은 성전 뜰에서 유월절 양을 죽였고,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에 뿌렸으며 레위 사람들은 그 가죽을 벗겼다. 그리고 나서 그 짐승의 살을 백성들에게 그 족속의 차서대로(11, 12절) 한 마리의 양을 10인 이상 20인 이하의 비율로 할당했다. 그들은 이것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굽고 규례대로 그것을 먹였다(13절). 성만찬을 위해 바쳐진 다른 제물들도 그 살은 화목제의 규례대로 굽고, 모든 백성에게 속히 분배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것으로써 속죄하고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그들의 기쁨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그것을 먹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도 그들 스스로 유월절 양을 먹음으로써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도록 노력했다(14절). 성직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는 것이 그들 자신의 영혼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한 변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대중 예배에 많이 참석한다고 해서 그들 골방이나 집에서는 예배를 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레위인들은 여기에서 그들 자신과 제사장들을 위해 준비하였다. 제사장들은 제단의 일을 하는데 온종일 보냈기 때문에 레위인은 만찬 때에 제사장들도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몫도 준비해 놓았다. 여기에서 성직자들은 같은 주인을 섬기는 종으로서 그리고 형제로서 서로를 돕고 서로의 일을 진척시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각 처소에서 그들의 직임을 행했다(15절). 노래하는 자들은 신선한 노래와 악기로 회중의 기쁨을 표현하고 선동했으며, 회중으로 하여금 이 일을 매우 즐겁게 행하도록 힘써 주었다. 그리고 문지기들은 문에서 이 모임에 부정하고 소란한 것이 개입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아무 것도 도난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아무도 이 의식이 끝나기 전에 그곳을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이처럼 그들이 그들의 형제를 돌보고 있을 동안, 레위인들은 그들을 위해 유월절 양을 준비했다. 모든 의식은 율법대로 매우 정확하게 행해졌다(16, 17절). 사무엘 시대 이후로 이처럼 정결한 의식은 없었다(18절). 왜냐하면 히스기야의 유월절에는 규례에 어긋난 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패트릭 감독은 이에 대해 요시야가 행한 이 유월절은 그 어느 선조 왕의 것보다 훌륭했다고 보았다. 요시야는 다윗이나 솔로몬, 여호사밧만큼 많은 재산을 갖고 있지는 못했으나, 그 어느 왕보다도 더 정성스럽게 스스로의 제물을 바쳐 회중들이 유월절과 성만찬의 자리에서 모두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역대하 36장 – 예루살렘의 멸망>
- 이제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멸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들이 다시 돌아와 사는 것을 원하셨다. 따라서 그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설득하시면서 은혜롭게 되기를 기다리셨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열왕기 하의 마지막 세 장에서 크게 다루어져 있다. 여호아하스가 백성들에 의해 추대되었다(1절). 그러나 그는 즉위한 지 석달 만에 애굽 왕 파로 느고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는 애굽으로 잡혀 갔으며,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한 대가로 이스라엘이 벌금을 물게 되었다(2-4절). 이 젊은 왕에 대해서 우리는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그가 만일 그의 부친의 경건한 길을 따랐다면 그는 오래 다스리며 번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열왕기에서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는 것을 읽었다. 그러므로 그의 승리는 짧았고 그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여호야김이 애굽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어 11년 간을 다스렸다. 유다의 숙적인 애굽의 왕이 자기 마음대로 유다의 왕을 세우고, 또 그 왕에게 제멋대로의 이름을 주었을 때 유다는 얼마나 비참했겠는가!(4절) 애굽 왕은 엘리아김을 왕으로 삼고, 그가 그 왕을 지배할 권세를 지니게 된 표징으로 여호야김이라 불렀다. “여호야김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5절). 우리는 ‘그가 행한 모든 가증한 일’에 대해 읽을 수 있다(8절). 그는 매우 사납고 사악했다. 우상 숭배자들은 대체로 가증한 길을 가게 된다. 애굽 왕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고, 바벨론 왕이 그를 치러 온 이야기가 계속된다(6절). 그는 여호야김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데리고 갈 의도로 그를 묶었다. 그러나 바벨론 왕은 그의 마음을 바꾸어 여호야김으로 하여금 자기 신하가 되게 했거나, 아니면 그가 잡혀 가기도 전에 죽어버렸던 것 같다. 그러나 그 후 성전에 있던 가장 훌륭하고 귀한 기구들이 바벨론에 있는 느브갓네살의 신당으로 옮겨져 사용되게 되었다(7절). 그 이유는 그 당시에는 이 세상의 어느 신당도 예루살렘의 성전만큼 훌륭히 기구를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유다의 죄는 그들이 이교도의 우상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받는 벌로 그 성전의 기구가 열방 나라의 신들을 섬기는데 이용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물건을 더럽히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도 그들의 적에 의해 더럽혀짐을 당하도록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되돌려질 것이라고 감언이설로 속이던 그 기구들이었다(렘 27:16).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나머지 기구들도 옮겨지기 될 것이라고 말했고(렘 27:21, 22) 그것은 그대로 되었다. 그러나 이 기구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진 일이 예루살렘의 재앙을 초래한 것과 마찬가지로, 벨사살이 이 신성한 기구를 더럽히게 된 일로 말미암아 바벨론에는 죄악이 가득차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 기명으로 술을 마시며 그의 신들에게 영광돌리고 있을 때 사람의 손이 나타나 벽에다 그의 멸망을 예시했기 때문이다(단 5:3 이하). 여호야김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는 열왕기에는 그의 심술이 기록되었다(8절). 그의 심술이라는 것은 아마도 그가 마음 속에 바벨론 왕을 배반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유다 학자들은 이것을 그의 시체에서 발견된 우상을 영예롭게 하기 위한 문신의 흔적으로 풀이하였다. 레위기 19장 28절에서 하나님은 이러한 문신을 금하셨다.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혹은 여고니야)이 그대신 왕이 되어 그 악한 통치를 했다. 그러나 석달 열흘 후에 바벨론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사로잡아 오게 했고, 이 때에 성전의 귀한 기구도 더 가져오도록 했다. 여기에는 그가 다스리기 시작한 때가 8살로 기록되어 있으나 열왕기에는 18살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그가 8살 때 그의 아버지와 함께 다스리기 시작했다고 보지 않는 이상 여기에 기록된 나이는 사본한 사람의 실수였던 것 같다.
- 여기서는 유다 나라와 예루살렘이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멸망한 사실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시어 언약을 맺으시고 그와 교제를 하실 때)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그 땅을 떠나라고 부르심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타락한 자손은 그 나라로 다시 보내어졌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조상을 위해 귀중히 여겼던 그 은혜와 그가 부름을 받아 언약을 맺게 된 그 유익을 박탈당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제 모든 것은 허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 왕이 된 시드기야는 그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해서 파멸하게 되었다. 즉 그는 하나님과 바벨론 왕에 대해 매우 잘못 처사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그의 친구로 삼기만 했다면 그의 파멸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에게 하나님의 전갈을 전했다. 만일 그가 이 전갈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는 좀더 평정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레미야 앞에서 겸비치 아니하였으므로 (12절) 벌이 내린 것이다. 이 용맹한 왕은 그가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더라도, 여호와의 말씀을 이르는 초라한 선지자 앞에서 겸손히 하여 그의 경고를 듣고 그 스스로를 바로잡아야 했을 것이다. 또한 그 조언을 받아들여 그대로 행하며, 여호와의 말씀으로 명해진 권능에 그 자신을 복종시켜야 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적의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교만한 자를 겸손케 하실 것이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 열방 만국 위에 세워졌으며(렘 1:10) 그가 아무리 초라하게 보이더라도 누구든 그 앞에서 교만을 꺾지 않으면 위험을 당하였다. 만일 그가 바벨론 왕과의 언약을 충실히 지켰다면 그의 멸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비록 성실히 조공을 바칠 것을 맹세했지만 그를 배반하고 그와의 계약을 불성실하게 깨뜨려 버렸다(13절). 바벨론 왕의 분노를 돋우어 그에게 이처럼 가혹한 대우를 하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일 때문이었다. 모든 나라는 언약을 매우 신성한 것으로 여겼으며 그 의무를 이행치 않는 자를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로 보았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모든 경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가 그의 언약을 속인다 할지라도 그가 이미 손을 내밀어 언약하였으므로 그것을 피하기 못하게 되어 있었다(겔 17:18). 비록 느브갓네살이 이방 사람이고 적이라 할지라도 일단 그와 언약을 맺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시리라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 시드기야가 멸망하게 된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강퍅케 하여 그에게로 돌아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고집을 세워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의 목에 하나님의 굴레를 씌우려 하지도 않았고 또한 그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다. 그 결과 그는 고침을 받을 수도 또한 살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