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1장 – 고레스의 선포>
- 고레스는 유대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게 되었다. 그는 느브갓네살과는 대조적으로, 바벨론 왕국의 주인이 되자마자 느브갓네살의 가족을 제거하고 유대 민족의 해방을 선포했다. 이러한 선포가 있게 된 근원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 시키셨다”고 했다. 제왕들의 마음도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으며, 흐르는 시냇물과 같이 하나님은 당신이 뜻하는 대로 어느 길로든지 그들의 마음의 방향을 돌리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또 섬기는 방법도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아셨고 그를 통해 역사하실 방법도 아셨다(사 44:4).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서 세상을 지배하시며, 어느 때에 어떤 선한 일이 일어나든 그 일을 하도록 마음을 감동시키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은 인생들의 마음에 생각을 두시고,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이해력을 주시며, 당신이 기뻐하시는 뜻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행해지는 선한 일은 그 어느 때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께만 그 일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 사건은 예레미야의 예언과 관계되어 있다.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올 것을 약속했을 뿐 아니라, 시온이 받을 은총의 시간도 확정하셨다. 정해진 기간은 70년이었다(렘 35:12; 29:10).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겠다고 하셨던 약속을 지키신 그 분은(출 12:41) 이번에도 역시 틀림없이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고레스가 지금 행한 이 일은 오래 전에 말했던 하나님의 종들의 말씀을 응하게 하는 것이다(사 44:26). 살아있는 동안은 예레미야가 증오와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능력 있는 한 군주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나온 여호와의 말씀을 성취시키는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그것은 예레미야가 죽은 지 오랜 후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영예롭게 했기 때문이다.
- 고레스의 선포는 다른 면에서도 성공을 가져왔다. 그가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하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올라갔다(5절). 그 지도자들은 유대와 베냐민의 족장들, 곧 재능이 탁월하고 경험이 많은 자들이었다. 제사장들 레위인들과 더불어 동반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올라갈 마음을 주신 사람들이었다. 이 해방을 선포하도록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신 바로 그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도 움직여 그 해방의 혜택을 취하도록 하셨다. 그것은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만군의 주의 영으로 되기 때문이다(슥 4:6). 어떤 자들에게는 바벨론에 머물고자 하는 유혹이 컸을 것이다. 그들은 거기에 안전하게 정착했고, 그 이웃과 마음도 맞았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가 좋사오니” 라는 말을 할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돌아가려는 용기를 막는 것들이 많았고 또 컸을 것이다. 그 여행은 길고, 그들의 처자식들은 여행에 익숙치 못했으며, 그들의 고향 땅은 오히려 그들에게 낯선 땅이 되었고, 그리고 가는 길도 알지 못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땅은 모두 폐허가 되었고, 자기들을 쉽게 희생시킬 수 있는 그런 원수가 사면에 둘러선 땅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생각 때문에 바벨론에 머물거나 적어도 먼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얼음을 깨뜨리고 나아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노상에 있을 사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시킨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성령과 은총을 통해서, 커다란 야망을 그들에게 채워주셨고, 자유에 대한 자기들의 땅에 대한 아름다운 애착을 가지게 하셨으며, 자기들의 신앙에 입각하여 자유롭고 공공연히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욕망을 가득 채워 주셨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그들 멋대로 버려 두시어 그들의 육정을 따르게 하셨더라면, 그들도 바벨론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시온을 향하는 마음을 두셨고, 이방 나그네들처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묻는 마음을 주셨다(렘 1:5). 그들은 새로운 세대였기 때문에,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를 떠나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것과 같은 형편에 놓였다(히 11:8).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하든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요, 그가 그 일을 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우리에게 의욕을 주시고 또 일을 행하도록 역사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이 땅을 향해 있고, 이 땅의 것들을 좋아하게 되어 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위로 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복음의 초청도 고레스의 선언과 같다.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한다”(눅 4:18). 죄의 불의한 지배 아래 얽매인 자들,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께 대한 의무로 돌아가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길을 여셨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죄의 노예 상태에서 떠나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초청은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고(고레스에게 준 권세보다도 훨씬 큰 권세이다. 2절), 하나님의 전을 세울 책임, 곧 세상에 교회를 세우는 일, 사람들 가운데 나라를 세우라는 책임을 주셨다고 밝히셨다.
<에스라 2장 – 포로 귀환>
-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내용을 관찰할 수 있다. 포로에서 돌아온 가족들에 대한 기록과 각 가족의 수에 관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과 용기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념과 자기 고국땅에 대한 애착의 대가요, 그들의 명예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선한 모범을 따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초청을 맞아들인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은 이것보다 더 신성한 기록인 "어린 양의 생명책에서" 영예롭게 발견될 것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가족들의 명부가 보존된 것은 역시 후손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즉 후손들은 그 기록을 통해서 자기들의 근원과 가족 관계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도(道)의 거민’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유다는 한때 혁혁했던 왕국이요, 다른 여러 왕국들이 그 나라의 부속 도였다. 그래서 그 부속 도들은 유다에 종속되어 의존했었다. 그러나 이제 유다 자체가 하나의 도가 되어서 바아사왕으로부터 법률과 직권을 위임받게 되었고, 바사왕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의는 민족을 존귀케 하나, 죄는 민족을 왜소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으라.
- 그들이 각각 본성(本城)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즉 이전에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지정해 준 도성을 말한다. 적어도 그 때에 지정된 그 비슷한 도성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이의가 있을 법도 한데, 자기들의 도성이 없다고 항의한 자들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이 첫째로 언급되어 있다(2절).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그들에게 있어서 모세와 아론이었다. 전자는 그들의 우두머리 방백이고, 후자는 우두머리 제사장 격이었다. 느헤미야와 모르드게가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혹자는 우리가 뒤에 가서 볼 수 있는 그 유명한 사람들과는 동명이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마 동일한 사람이었으나, 후에 자기들의 나라를 섬기기 위해 궁정으로 되돌아 갔을지도 모르겠다. 이들 중 어떤 가족들은 그들 조상들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었고, 또 어떤 가족들은 자기들 이전에 살던 지명을 따라 불리우고 있다. 우리들에게도 많은 성(姓)이 사람들이 이름을 따르거나 지역의 이름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에스라 3장 – 성전의 기초>
- 귀환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 7월에 예루살렘에서 총회를 가졌다(1절). 그들은 봄에 바벨론을 떠나 적어도 4개월 동안 여행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스라도 그의 동료들과 함께 여기까지 오는데 그런 기간이 걸렸기 때문이다(7:9). 그러므로 도착하자마자 7월이 되었다. 7월에는 여호와의 많은 절기가 들어있던 달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권위의 명령에 의해서라기 보다 그들 스스로 예루살렘에 모였다. 그들에게는 이제 막 와서 자기들 일이나 자기 가족들의 일들이 태산같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제단에 나오는 일을 지체하는 구실을 삼지는 않았다. 많은 어리석은 자들은 세상 일에 안심을 얻을 때까지 하나님과의 교제를 연기한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신앙에서 바른 신앙으로 새로이 돌아왔으므로 자기들의 종교에 대하여도 지극히 열성을 나타낸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기 위해서 나라 안의 모든 업무를 제쳐 두었다. 그들의 이러한 경건한 열심이 한 마음이 되어 한 사람같이 모여왔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종교적인 업무를 위해서 세속적인 업무를 지연시키라. 그러면 세속적인 업무도 더 번성하리라. 지도자들은 회중들이 참례할 제단을 마련하려고 애썼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 방백들이 제단이 서 있던 옛 장소(3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제단을 세웠다(2절). 여기에서 다음의 교훈을 배우자.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 할 것. 가난과 고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모든 길에서 항상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려고 더욱 힘써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인도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예물을 드려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을 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할 것. 그들은 즉시 성전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단을 쌓을 수는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가 어디를 가든지 제단을 세웠다. 우리도 어디를 가든지 비록 우리가 설교라는 등대와 성찬이라는 진설병이 없다고 해도 기도와 찬양의 제물마저 드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예물을 성별시켜 주는 제단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 돌아온 유대인들 중에서는 성전을 세워야 하느냐 세우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그 일은 즉시 결정되었다. 가장 신속히 성취되어야 할 일이었다. 누가 그것을 시작했는가?-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그들이었다. 하나님의 사업은 행정관들과 사제들과 백성들이 열심이고, 그리고 모두 자기의 직위에서 동조하여 힘을 합치면 잘 될 것이다. 그들에게 그 일에 한 가지의 마음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그 전망이 밝았다. 그 일의 진전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 그 일을 진전시키기 위해 레위인들을 감독으로 세웠다(8절). 그래서 감독들은 일꾼을 독려하고(9절) 그리고 부드럽고 위안의 말로 그들의 손을 강하게 해줌으로써 그 일을 진전시켰다. 직접 일하지 않는 자들이라도 일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독려함으로써 선한 봉사를 할 수 있다. 성전 기초가 놓일 때, 하나님은 어떻게 찬양을 받으셨는가?(10, 11절) 모세로 말미암아 지정된 나팔을 든 제사장들과 다윗의 규례대로 제금을 든 레위인들이 찬송했다. 이 찬양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코 낡아지지 아니하는 찬미를 부르기 위함이며, 우리의 혀가 “주는 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는 시편 136편의 후렴주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자비의 모든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자.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우리의 슬픔이 아무리 크든지, 우리의 두려움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찬송을 고백하자. 실패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자비는 실패하시지 않는다. 이 찬성을 여기서와 같이 열심을 다하여 부르자.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서 포로될 때나 본국에서 나그네 될 때도 이스라엘을 향하여 영원히 함께 하시는 그 자비를 찬양하자. 상태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선하시고(시 73:1) 우리에게도 선하시다. 교회의 번영이 쇠하는 것 죽어가는 것 같이 보이나 다시 소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영원하심 때문임을 알자. 그러므로 교회는 존속할 것이다. 성전을 가지지 못했던 비극을 알고 있는 그들은 성전 기초가 놓이는 것만 보아도 기쁨의 함성으로 여호와를 찬양했다(11절). 그들에게는 이 기초까지도 위대하게 보였고, 죽음에서 살아난 듯한 기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