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10장 – 에스라의 개혁>
- 에스라의 겸손과 죄의 자복은 백성들에게 어떠한 좋은 영향을 미쳤는가. 그들이 기쁘게 여긴 새 총독이 근심에 잠겨 있으며, 그것은 모두 그들과 그들의 죄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이 성읍에 퍼지자마자 곧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여 그 이유를 알고는 그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1절).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로 인해 우는 것을 보고, 도무지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치도 못하던 자들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통애하게 될 수 있다. 지위 높은 자의 선한 본보기가 그 아랫사람들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주는가 보라. 서기관이며 학사, 그리고 왕의 신임을 얻고 있는 에스라가 백성들의 타락을 심히 탄식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이 중한 잘못을 범하였고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이처럼 그들로 인해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흐리게 했다. 즉 에스라가 이처럼 울 때 남녀와 어린아이가 심히 통곡했다. 이 때에 스가냐는 어떠한 훌륭한 제안을 했는가. 그곳은 ‘보킴’ 즉 ‘우는 자들’의 장소였다. 그러나 상세히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고로 그에게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욥의 친구들과도 같이 스가냐(바벨론에서 에스라와 함께 돌아온 자들 중 한 사람 8:3, 5)가 일어서서 에스라에게 말할 때까지 그들 가운데는 깊은 침묵이 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스가냐가 한 말을 살펴보자. 그는 백성들이 범죄함을 시인했다. 그리고 에스라의 자백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확증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나이다(2절). 그 일은 너무 명백하여 부인할 수도 없고 심히 악하므로 용서받을 수도 없나이다.” 스가냐 자신이 이러한 일을 범하였다는 사실은 나타나 있지 않다(만일 그의 눈에 들보가 있었다면 그는 그의 형제의 눈속에 있는 들보를 그처럼 명확하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집의 몇 사람이(26절에 나타나 있듯이) 범죄하였으므로 그는 그 자신도 범죄자로 간주했다. 그는 용서를 구하거나 죄를 변명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친족 몇이 그 죄를 범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레위 사람처럼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알지 못하였다” 하였다(신 33:9). 아마도 그의 아버지가 아내로 취한 이방 여자는 그에게 공평치 못하고 불친절한 서모였고 그 가정에 불화를 끼쳤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여자들도 이와 비슷하리라 짐작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이 타락함을 몰아내려 한 것 같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개인의 분노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공적인 유익함에 이바지하게 된 것은 이것이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 그는 이 개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훌륭한 방법을 택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에게 그 일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방법까지도 알려 준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보라(수 7:10, 11). 그들은 이 훌륭한 제안에 대해 얼마나 굳은 결단을 내렸는가?(5절) 그들은 이 일이 행해져야 한다고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좇아 행하겠다고 맹세했다. 빨리 맹세하면 빨리 찾을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이방 아내들에 대해 얼마 전에 결정한 일이 수행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들은 쇠가 달아 있을 때에 쳤다. 그래서 개혁의 수레 바퀴는 곧 돌아가게 되었다. 에스라는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에게 삼일 내에 예루살렘에 있는 그에게 올 것을 명했다(7, 8절). 그리고 왕으로부터 형벌을 가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으므로(7:26), 그는 누구든지 이 소집에 응하기를 거부하는 자의 재산을 몰수하고 파문시키겠다고 경고했다. 이 경건할 일에 참예하려 하지 않는 자에게 내린 저주는, 그의 재산이 그를 대신하여 이후부터 영원히 성전 봉사를 위해 쓰여지게 될 것이며 그 자신은 수치스럽게도 이후로부터 영원히 믿음의 특권과 영예를 박탈당하리라는 것이었다. 즉 그러한 자는 추방당해야 했다. 정해진 기일 내에 대부분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와 하나님의 전 광장에 모였다(9절). 이 일에 참여할 만한 열의가 없는 자들은, 아마도 그들이 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오기를 싫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에스라의 권위에 경의를 표해야 했고 또 형벌당하는 것이 두려워 감히 오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 비를 내리심으로써(9, 13절) 당신의 분노를 나타내셨다. 이 비 때문에 못 온 자도 있었을 것이다. 또 광장에서 비를 맞은 자들은 그것이 매우 근심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들이 울 때 하늘도 울었는데, 이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에 대해 진노하셨으나, 그들이 회개하였을 때는 매우 기뻐하셨으며(삿 10:16 참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셨다” 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회개가 선한 열매를 맺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는 땅을 풍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느헤미야 1장 – 느헤미야의 기도>
- 바사 궁에서 느헤미야의 위치를 살펴보자. 우리는 그가 수산에 있는 바사 왕궁에서 ‘왕의 술관원’이었다(11절)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아마도 왕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을 시켜 자기들의 시중을 들게 하는 것을 하나의 당당한 위풍으로 간주했던 것 같다. 느헤미야는 왕실에서 이러한 직분을 맡고 있었으므로-바로의 궁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통치자로 적합했던 모세와 같이, 또한 사울의 궁에 있었던 다윗과 같이-그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을 하기에 보다 나은 자질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왕과 그 주위에 있는 자들과의 이점을 이용해서 자기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왕실에서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 자리에 있었는가를 성급히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그가 ‘왕의 술관원’ 이었다는 것(이것은 영예롭고 유익한 신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큰 신임을 얻고 있던 지위였다)은 본 장(本章)의 끝에 가서야 나오는데, 그것은 다음 이야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단지 “내가 수산 궁에 있었다”고만 밝혔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하며 자기의 업적에 관한 이야기는 더디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위안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을 때는, 결코 그 일을 할 도구가 모자라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의 일에 사용하고자 정하신 자들에게는,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한 자질과 소명을 하나님께서 주신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그의 남은 자를 두신다. 우리는 아합의 집에 오바댜가 남은 것을 읽을 수 있으며, 가이사의 집안에 여러 성도들, 그리고 수산 궁에 믿음이 깊은 느헤미야가 남은 것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때로 왕실을 양육장으로 만드실 수 있으며, 또 교회의 명분을 지원하고 보살피는 자들의 성소가 되도록 하시기도 하신다.
- 우리는 여기에서 느헤미야의 기도를 읽을 수 있다. 이 기도는 그가 주야로 종종 하나님께 드려오는 그 모든 기도가 연관된 기도이다. 그는 그동안 줄곧 예루살렘의 황폐를 슬퍼해 왔다. 또 그는 자기의 임군인 왕에게 예루살렘에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탄원을 하려 하고 있다는 뜻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 굴복하여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께 겸손하고 경건한 간구를 드렸다(5절). 이것은 다니엘의 태도와 매우 유사하다(9:4).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 가까이로 이끌어 주며,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그의 존귀와 영광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지녀야 된다는 것. 우리는 그가 하늘의 하나님이며, 우리보다 무한히 높으신 분이며, 우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으로서, 높은 곳과 낮은 세상에 있는 천사와 왕들의 모든 계율과 권능을 무한히 능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하나님 백성은 모두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그의 모든 적들은 그의 강력한 진노를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조차도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위로와 기쁨이 된다.그의 은총과 진리에 대한 거룩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약속된 긍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베푸신다.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아무리 많은 긍휼을 베풀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기도와 자백을 들으시고 받아 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다(6절). 느헤미야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자비를 간구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그가 하는 일을 형통하게 하시고 왕과의 일에 은총을 내려 주실 것을 특별히 탄원함으로써 기도를 마치고 있다. 그 왕을 ‘이 사람’ 이라고 부른 것은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단지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라도 스스로 그러함을 알아야 하며(시 9:20), 다른 사람들도 그들은 사람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그가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고 간구한 것은 왕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왕에게 말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입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에게서 오는 호의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때, 사람에게서 온 그 호의가 마음에 기쁨이 될 수 있다.
<느헤미야 2장 – 왕과의 대화>
- 이제 느헤미야는 자기의 안색에 나타난 근심과 슬픔에 대해 왕이 자기에게 물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처럼 높은 분에게 말하는 자는, 당돌하게 자기의 문제를 꺼내지 말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제시해야 한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감히 그의 문제를 말하기 전에, 왕이 기분 좋은 상태에 있는가를 알아보려 했다.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그를 시험해 보았다. 그는 왕의 요청을 받았을 때, 왕이 그의 안색을 살펴주기를 기대하면서, 술을 따라 주었다. 그는 평시 왕의 앞에서 슬픈 내색을 보이지 않고 슬픈 일을 당한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한(에 4:2) 왕궁의 법도대로(조신들은 이것을 지켜야 한다) 따라 행했다. 비록 그는 타국인으로서 사로잡혀 온 자였지만, 편하고 유쾌하게 지낼 수 있었다. 선한 사람들은 믿음의 생활이 즐겁다는 것을 세상에 확신시키며 믿는 자는 우울한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자기들의 일을 즐겁게 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전 3:4). 이제 느헤미야는 자기가 슬퍼해야 할 일을 알았고, 그것을 나타내었다. 예루살렘의 비참함은 그가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의 슬픈 안색은 왕에게 그 이유를 물을 기회를 주었다. 그가 슬픔을 가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말 요셉의 환란에 대해 슬퍼한 것이지 자기들의 얼굴을 손상시키는 위선자들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필요할 때는 그의 슬픔을 감출 수 있었다(그 마음은 은밀한 비통을 알고 있으며, 또 웃음 가운데는 때로 슬픔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슬픔을 표하는 것이 그의 목적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비록 그는 왕 앞에서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고, 또 아마도 술관원이라는 직책에 의해 그가 왕에게 술을 주기 전에 마실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환란 속에 있는 한 그의 마음이 즐거울 수가 없었다.
- 그는 왕에게 겸손히 청을 올렸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자, 왕의 지혜에 매우 겸손히 복종하는 태도를 가지고 간청을 올렸으나(5절), 그의 태도는 매우 솔직했다. 그는 장관으로서 유다 땅에 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기 위해 얼마 동안을, 즉-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이-아주 여러 달 동안을 허락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다시 왕의 명을 얻었는지 아니면 왕에게 왔다가 다시 돌아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최소한 그곳에서 12년 이상을 다스렸다(5:14). 또한 느헤미야는 다른 총독들에게 왕이 명을 내려 자기를 호위하게 해 줄 것(7절)과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의도한 일을 위해 레바논 삼림 감독으로 하여금 그에게 재목을 주도록 명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 왕은 그에게 큰 은혜를 베풀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고 물었다(6절). 왕은 느헤미야를 잃고 싶지 않으며 오랫동안 그가 없이 지내고 싶지 않다는 심정을 시사했지만, 역시 왕은 승낙했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에게도 실질적인 친절을 베풀었다. 또한 그 위임장에 삽입해 넣을 사항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8절). 이것은 그의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이었다. 야곱의 씨앗이 야곱의 하나님을 구하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의 청원이 성공한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시하고 있다. 왕후도 그 자리에 있었다. 왕후가 왕 곁에 앉는 것은 바사 궁에서는 통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한다(에 1:11). 그 왕후가 느헤미야의 적이어서 방해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느헤미야가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를 찬미하기 위해서 이 사실을 언급해 놓은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그의 진실한 친구였기 때문에 그녀가 그 자리에 참석함으로써 돕게 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찬미해 놓은 것이지, 그것은 확실치 않다. 하나님은 권능과 은혜를 베푸셨다. 그가 목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왕에 대한 그의 공적이나 세력, 혹은 그의 훌륭한 처사 때문이 아니라, 그의 하나님의 선한 손이 그를 도왔기 때문이었다. 은총을 입은 영혼을 지닌 자들은 그들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은혜로운 일 속에서 하나님의 손, 곧 그의 선하신 손을 깨닫는다. 이것은 여호와의 행하심이므로, 배나 더욱 기쁨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