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3장 – 성곽 중수>
- 본 장을 구분한 방법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길은, 성곽 건축자들이 그 일을 어떻게 나누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건축자들 각자가 자기들이 해야할 일을 알게 하고, 선한 경쟁심이나 좀더 잘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일하게 하기 위해서 일을 분할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어떤 분쟁이나 원한 그리고 파벌 의식은 없었을 것이다. 본 장은 내용을 보면, 그들은 어떤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오직 공적인 유익을 위해 그들의 최선을 다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예루살렘 성벽을 중수하는 이 이야기에는 주목할 만한 일이 몇 가지 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건축하는 자들의 선두에 나서서 지휘했다(1절). 사역자들은 모든 선한 일에도 앞장서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리로 뿐만 아니라 모범된 행동으로도 남을 가르치고 권면해야 할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힘든 일이라면, 그들보다도 더욱 합당한 자가 어디 있겠는가? 만일 위험한 일이라면 그들보다도 더욱 합당한 자가 어디 있겠는가? 만일 위험한 일이라면, 그들보다도 더욱 그러한 모험을 하기에 적합한 자가 어디 있겠는가? 대제사장의 권위는 매우 큰 것이었으므로, 그는 이 일에서도 독특한 역할을 해야 한다. 제사장들은 ‘양문’(羊門)을 수리했다. 성전에 바칠 양을 이 문을 통해 가져왔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여호와의 번제물은 제사장들의 유업이 되는 것이므로, 제사장들이 그것을 수리하는 일을 맡았다. 이 문에 대해서는 “그들이 그것을 성별하였다”는 이야기만 언급되어 있는데, 그들은 말씀과 기도로써 그리고 아마도 제물도 드려서 양문을 성별하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것이 성전으로 통하는 문이었거나, 아니면 성벽이 거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비록 그들이 모든 곳의 벽을 동시에 건축했겠지만) 이 문이 제일 먼저 중수되었으므로, 그들은 이 문에서 그들의 성읍과 성벽을 하나님의 보호에 맡긴다는 의식을 거행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제사장들이 그것을 건축한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제사장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성별케 된 자들이므로, 그들은 모든 일을 하나님을 위해 성별해야 했고, 평범한 행동도 경건한 방식을 좇아 행해야 했던 것이다. 이 일에 참여한 자들은 매우 많았다. 그들은 능력에 따라 일을 분담했다. 모든 사람은 공적인 사업을 위해 각자 자기 직책과 권리에 따라 최선을 다하여 돕도록 해야 한다. 혼자서는 감시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라도, 힘을 합하면 해 낼 수 있다. 많은 사람의 협조가 일을 수월하게 만들 것이다. 예루살렘에 거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매우 적극적으로 이 일을 행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사욕이나 그들 개인의 이익을 위하지 않고 단지 공적인 유익만을 위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제일 먼저 여리고 사람들이 나와 있으며(2절), 또 기브온과 미스바 사람들(7절), 그리고 사노아 거민들(13절)이 나와 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예루살렘과 다른 성읍의 지도자들 몇 명도 이 일을 매우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들은 자기들의 명예를 걸고 자기들의 재력과 능력을 최대한으로 기울여 이 선한 일을 촉진시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을 일컬어 각 성읍의 ‘지방(부분)’을 또는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라고 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도 있었고(12절), 또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자도 있었고(14절),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자(15절), 벧술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16절), 그일라(keilah)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와, 그 나머지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가 있었다(17, 18절). 아마도 바사 정부는 한 사람에게 하나의 강한 성읍을 맡기지 않고 두 사람을 두어 서로 감시하게 했던 것 같다. 로마도 두 명의 집정관을 두었었다.
- 여기에 드고아 귀족들에 대한 타당한 비난이 나와 있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의 여호와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한 때문이었다(5절). 즉 그들은 이 일에 대한 의무를 행하러 오지 않았다. 마치 귀족의 권세와 자유가 하나님을 섬기며 선한 일을 하는 의무를 면제시킬 수 있는 것처럼 행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영예이며, 참된 자유인 것이다. 귀족들도 자기 나라의 공익 사업에 힘쓰는 것이 자기들을 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보다 자기들이 고귀하고 유용한 일에 더욱 깊이 참여하는 것 이상으로 귀족들의 고귀성을 말해주는 것이 있겠는가? ‘옛 문’을 중수하는 일에 두 사람이 협력하였다(6절). 그들은 함께 이것을 건축하여 그 영예를 나누어 가졌다.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선한 사업을 이룰 수 없을 때, 우리의 일에 동참해 주려는 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옛 문’으로 불리워지는 이유는, 멜기세덱에 의해 제일 먼저 건축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옛 살렘 성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다. 선하고 정직한 상인들도 제사장이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일에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금장색과 향품 장사와 상고들이었다(8, 12절). 그들은 직업 때문에 그 일이 자기들에게는 면제된다고 생각하거나, 공적인 일을 하기 위해 그들의 상점을 떠날 수 없다고 항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손실이 자기들이 직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하여 분명히 보상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을 진척시키도록 도와준 자들로 살룸(shallum)과 그 딸들이 언급되어 있다(12절). 이 여자들에게는 비록 개인적인 봉사를 할 만한 능력은 없었지만, 그들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거나 혹은 부유한 과부로서 재목을 사들이고 인건비를 지불할 수 있는 돈을 기부했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4장 3절에서, 복음에 그와 함께 힘쓰던 선한 여인들을 언급해 놓고 있다. 어떤 자들은 자기 집과 마주 대한 곳을 중수했으며(10, 23, 28, 29절), 또 어떤 자는(그는 유일한 숙박인이었던 것 같다) 자기 침방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0절). 모든 사람이 해야 할 선한 사업이 있을 때는, 각자 자기와 가장 가깝고, 또 자기의 손이 미칠 수 있는 곳부터 해 나가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집 문 앞을 쓴다면 거리는 깨끗하게 될 것이다. 또한 각자가 한 가지를 고친다면 모든 것을 고칠 수 있게 된다. 만일 침방만을 가진 자가 그 앞을 중수한다면, 그는 그의 할 일을 한 것이다. 어떤 자는 그에게 합당된 일을 힘써 중수하였다고 적혀 있다(20절). 즉 그는 매우 열성을 기울여 그 일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은 냉담하거나 무관심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힘써 일했으므로 두드러져 보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선한 일에 온 성의를 기울이는 것은 좋은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아마도 이 선한 자의 열성이 매우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여 더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일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 건축가들 가운데 한 사람은 여섯째 아들이었다는 것이 주목되어 있다(30절). 그의 윗형 다섯은 이 일을 돕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그는 했다. 선한 일을 할 때는, 윗 사람이 먼저 나설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윗 사람들이 혹시 선행을 하기를 싫어할지도 모르므로, 우리가 그들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나이 어린 자가 더욱 훌륭하며 하나님과 자기 세대에게 남보다 더 나은 봉사를 한다면, 그는 그야말로 훌륭한 신사일 것이다. 가장 쓸모 있는 것이 가장 영예로운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자들은 먼저 그들의 동료를 도왔으며, 수리가 필요한 또 다른 곳을 돌보았다. 므레못은 한 곳을 중수하고(4절), 또 다른 곳을 중수했다(21절). 드고아 사람들도 자기들이 중수한 곳 외에도(5절) 또 다른 곳을 중수했다(27절). 그런데 이들의 태도가 더욱 훌륭하게 보였던 것은, 귀족들은 일하기를 피하려는 나쁜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가만히 앉아 있기 위해 변명을 하지 않고, 귀족들의 태도에 대한 반발로 더욱 열심히 일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열성으로 탐욕스럽고 게으른 귀족들을 부끄럽게 하려 했거나, 아니면 그러한 귀족들의 태도에 대한 벌충을 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끝으로, 느헤미야 자신이 이 일에서 어떤 특정한 몫을 담당했다는 이야기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와 같은 이름을 지닌 자가 16절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그가 어떤 특정한 성벽 일부분을 중수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 모두를 감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일꾼들 중 반수는 긴요하게 중수해야 할 곳에서 일했고, 나머지는 파수를 섰다는 사실을 우리는 후에 발견할 수 있다(4:16). 한편 그는 손수 그 주위를 돌아다니며 건축하는 자들을 지시하고 격려했다. 그리고 틈이 있을 때마다 일을 손에 잡았다. 그리고 그는 또한 적의 동태를 살폈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읽을 수 있다. 키잡이가 돛대의 밧줄을 잡아당길 필요는 없다. 그에게는 앞을 살피는 일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느헤미야 4장 – 건축 훼방>
- 산발랏과 도비야는 유대 사람이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려는 시도에 대해 조롱과 경멸의 비난을 퍼부었다. 유대 사람들의 역사하는 사실이 곧 그 지방에 퍼졌다. 즉 유대인과 그 번영을 비웃는 적들의 온상지인 사마리아 지방에 이 소식이 전해졌던 것이다. 그들이 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살펴보자. 그들 마음의 반응. 그들은 이 큰 역사에 대해 매우 화를 냈고 크게 분노하였다(1절).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고 왔다는 소식 자체가 그들의 마음을 괴롭혔다(2:10).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유익함을 위해 이 큰 역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여지껏 그들은 예루살렘에 성벽이 건축되지 않는 한 그것을 집어삼킬 수 있고 그들이 원하는 때면 언제나 그곳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해 왔었다. 그러나 성벽이 쌓아지면 그것은 그들에 대한 방어벽이 될 뿐만 아니라 점차로 거대한 힘이 될 수 있었다. 교회의 힘과 안전은 그 적들에게 근심과 걱정을 가져준다. 말로 나타내는 그들의 태도. 그들은 그것을 비웃었으며 그들의 조롱거리로 만들려 했다.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의 악의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역효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그 사업은 저절로 좌절되고 말 어리석은 기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뒤늦게서야 방해하려고 했지만 때는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이 어떤 교만과 악의를 품고 공공연히 그들을 조롱했는가 살펴보자. 산발랏은 이 일하는 사람들을 이 미약한 유대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써 비웃었다(2절). 그들이 이 자료로 무엇을 하겠는가?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이렇게 급히 서둘러서 무엇을 하겠다는 건가? 그들은 성벽을 단 하루만에 쌓아 그 다음날 제물을 바치는 행사를 가지려는가? 어리석고 불쌍한 백성들이군! 그들 스스로를 얼마나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는가를 보라! 도비야는 일 자체에 대해서도 이에 못지 않는 경멸을 퍼부었다. 그도 역시 희롱하면서 그의 기지를 보여야만 했다(3절). 경건치 못한 희롱을 하는 자들은 서로 날카로운 말을 던진다. “불쌍한 일이로군” 그는 계속 말했다. “그런 일을 하다니…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그 재주 때문이 아니라 그 무게만으로도 곧 무너지리라.” 많은 선한 일들이 이처럼 교만하고 건방진 조소자들에 의해 경멸을 받는다.
- 느헤미야는 이러한 비난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겸손하고 경건하게 아뢰었다. 그는 그들이 말한 것을 관찰했다. 아마도 그들은 그의 시도를 조롱하면서 그를 낙담시키기 위해 그에게 이런 취지의 소식을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들의 어리석은 태도에 대해 어리석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약함을 책망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기도를 올렸다. 느헤미야는 그들이 당한 모욕을 하나님께서 살펴주시기를 간구했는데(4절) 우리는 이러한 그를 닮아야 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백성들은 때로 업신여김을 받는 백성들이 되어 경멸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받는 멸시를 모두 들으시고 또 들으실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위로가 되며 그들은 마치 귀먹은 사람처럼 조용히 참을 수 있는 이유이다(시 38:13, 15). “주는 우리의 호소를 들으시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평히 들어주시는 것 이상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그들의 부당함을 갚아주시고 그 비난을 적에게로 되돌려 주실 것을 간청했다(4, 5절). 그리고 이것은 기도의 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언의 영에 의해 말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조롱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은 우리로서는 이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그를 비방하는 자를 위해 손수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느헤미야는 여기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두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멸시하는 자들은 스스로가 그 영원한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다. 죄인들은 좀처럼 죄에서 돌이킬 수 없다. 물론 느헤미야가 이 죄인들의 마음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굳어져 있다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결코 회개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결코 그것을 덮어두지 마옵소서” 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이러한 기도를 드린 것은 “그들이 우리를 모욕하였나이다”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주의 노를 격동하였고 건축하는 자 앞에서 그들이 모욕적인 소식을 보냈나이다” 하는 이유에서였다. 우리가 사악한 핍박자들에게 분노를 갖는 것은 그들이 우리를 모욕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노하게 한 때문이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만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시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시 74:18, 22). 이러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건축하는 자들은 힘써 일했다(6절). 그들이 속력을 내어 잠시 동안 성벽의 절반을 쌓아 올린 것은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힘써 이 일을 진척 시키기에 노력했다. 선한 사업은 백성들이 마음을 다할 때 잘 이루어질 것이다. 적들의 비방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의무를 떠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서둘러 하도록 만들 것이다.
<느헤미야 5장 – 느헤미야의 기도>
-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모두 매우 지혜롭고 선하며 쓸모 있는 자들이었지만, 비슷한 경우에 있어서도 처사는 매우 달랐다. 즉 에스라는 민장들이 이방 여자들과 결혼하여 죄를 범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자기의 옷을 찢고 울면서 기도했으며, 그들을 다시 바로잡는 일이 불가능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집요하게 설득시키면서 개혁을 시도했다. 에스라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악한 소식을 들었을 때, 즉시 분노하여 그 비행을 책망하고 백성들도 그 일에 대해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강력한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강압적으로 개혁시키기 전까지는 결코 안정하지를 못하였다. 그는 뜨겁고 격렬한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신앙이 아주 깊은 사람들도 그 성품에서는 기질이 서로 많이 다르며, 따라서 그들이 하는 일의 결과도 다르다. 하나님의 사업은 훌륭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행해질 것이나, 그 일을 하는 데 택해진 방법은 다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처사를 비난하거나 우리 자신의 방법을 표준으로 주장할 수 없는 좋은 이유이다. 역사(役事)는 모두 다르지만 같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 느헤미야는 기도로써 그의 말을 끝맺었다(19절).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여기에서 느헤미야는 백성을 위하여 자기가 행한 것을 언급해 놓았다. 그것은 그 자신을 자랑하려는 교만에서나 그들을 책망하는 분노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자기를 부정하는 온유함에 대해 언급해야 했던 바울처럼, 이것으로써 그 자신을 옹호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자들을 부끄럽게 여겨 더 이상 압제의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스리는 자들도 그의 행실을 배워 자기들의 몫이라 하여 탐욕스럽게 요구하지 않고, 또 그들의 비용을 아끼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야만 그들도 그처럼 그들의 관대함에 대한 기쁨과 신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도로써 그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공훈을 세운 자(채권자)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람들에게 베푼 친절에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가 그의 명예를 위해 잃고 손해볼 것을 채워주실 수 있음을 믿는다는 마음을 표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내가 행한 선한 일을 생각해 주시기만 한다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심이 곧 우리의 행복이다(시 40:5). 그는 이렇게 자기에게 기쁜 보답을 해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저를 생각해 주시면 저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