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6장 – 산발랏>
- 우리는 여기에서 느헤미야의 적들이 얼마나 교묘하게 두 가지 계략을 만들었는가 하는 것과,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지혜에 의해 어떻게 다행스럽게 좌절되었는가를 보게 된다. 한 가지 계략은 그를 함정으로 꾀어 들이는 것이었다. 그 적들은 그 공사가 잘 진척되어 가고 있으며, 허물어졌던 성벽을 다 수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므로 비록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않았던 때였지만, 그들은 공사가 완료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1절). 그러므로 그들은 이 때가 아니고서는 느헤미야를 단번에 없애 버릴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느헤미야가 얼마나 훌륭히 경계하고 있는가를 들었으므로, 그를 공격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를 그들의 수중으로 끌어 들이려고 애썼다. 다음을 관찰하자. 그들은 매우 흉악한 계교로써 그를 만나려고 유인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를 감금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의혹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다른 성읍이 아니라 베냐민 지파에 속한 한 촌락에서 만나자고 했다. “우리 지역의 공동 이익을 모색하기 위해 와서 서로 만나자”고 한 것이다. 혹은, 그들은 그로 하여금 좀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의사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그들이 그와 우정을 맺어 좀더 친밀하게 지내기를 원한다는 것을 믿도록 하려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그를 해코자 함이었다.” 아마도 그는 그들이 자기를 잡으려 하거나 살해하려는 계획을 품고 있다는 비밀 정보를 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는 그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들이 자기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정당한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훌륭한 지혜로 이 요청을 거절했는가 보라! 그의 하나님께서 그를 가르치시어 그의 사자들을 통해 이 신중한 대답을 그들에게 전하게 하였다. “내가 이제 큰 일을 하고 있으니, 매우 바쁘다. 그런고로 그것을 떠나 너희에게로 내려갈 틈이 없노라”(3절). 그는 그 공사가 중지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잠시라도 그가 그곳을 떠나 있으면, 곧 공사가 중지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역사(役事)를 떠나 중단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 가겠느냐?” 그는 자기가 그들을 경계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들의 간교한 계략에 대해서도 아무런 책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가 올 수 없는 참된 이유 가운데서도 아주 훌륭한 이유를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이처럼 인사보다는 업무가 앞서야 된다. 허영된 동료들로부터 건전치 못한 오락회에 초청 받은 자는 그 유혹에 이처럼 대답하자. “우리는 할 일이 있는데, 결코 그것을 소홀히 여길 수 없노라.” 그들은 그에게 똑같은 권유를 네 번이나 보냈고, 그 때마다 그는 똑같은 대답을 주었다. 우리는 이것이 그들을 매우 화나게 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사실상 그들이 노렸던 것은 그 일을 중단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공사가 계획대로 잘 진행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같이 그들에게 대답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4절). 우리는 범죄를 행하라거나 무례한 일을 행하라는 끈질긴 추격을 받더라도 거기에 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똑같은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한결같은 이유와 결심으로 계속 저항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 또한 그들의 계획은 그를 협박하여 그의 일을 중단시키도록 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들이 느헤미야를 몰아내기만 한다면, 그 일은 물론 중단될 판이었다. 그러므로 산발랏은 그것을 꾀했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사업은 대체로 볼 때 허망하고 선동적인 사업으로 보이기 때문에 바사 왕실에 분노를 자아낼 것이라는 점을 깨달으라고 느헤미야에게 강요했다(5-7절).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가장 결백하고 훌륭한 일을 행하더라도 때로는 이러한 누명을 쓰게 된다. 이러한 말이 봉하지 않은 편지(공개장)로 그에게 전해졌다. 그 공개장은, 느헤미야가 자기가 왕이 되어 바사의 속박을 벗어나려 한다는 소문을 말해주는 것이요, 가스무가 그것을 사실이라고 입증하려 한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악의를 품고 있는 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견해를 일반적인 견해로 거짓 제시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제 산발랏은, 느헤미야가 자기의 결백함을 말하기 위해 왕궁으로 서둘러 가거나, 혹은 이처럼 오해받고 있는 것이 두려워 진행하던 일을 그만두리라고 생각하여, 이처럼 친구를 사칭한 보고를 했다. 이러한 추측 하에 산발랏은 “이 소문을 진압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함께 의논하자” 하고 그가 회합에 오기를 종용하면서, 이렇게 하여 그를 죽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가 그 일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처럼 산발랏의 말은 “기름보다 부드러웠으나, 그의 마음속엔 적의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유다처럼 입을 맞추고 나서 죽이려는 계획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는 것은 물론 소용없는 일이었다. 느헤미야는 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게 하려는 것(9절)이라는 사실을 곧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일이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낭설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처럼 그는 그 함정을 벗어나 그의 자리를 굳게 지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바람과 구름에 놀라 씨뿌리고 추수하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이처럼 소문이 난다고 하여, 우리는 단지 오해받는 것이 두려워서 분명한 우리의 의무를 태만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평판을 맡기자. 또 사실상 소문이 그렇게 나 있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록 많은 비난을 받고는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나쁜 평판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이 자기를 위협하며 자기의 일손을 약화시키려고 하고 있다고 그들의 악의를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그는 하늘을 향하여 진심에서 우러나온 간결한 기도를 드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여!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어떠한 곤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이 나아가 호소할 수 있는 선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지주가 되는 것은 없다. 즉 그들은 그들의 적이 위협하고 자기들의 손을 약화시키려 할 때에도, 믿음과 기도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으며, 그들의 손을 힘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해 어떤 일을 한다든가 그리스도의 싸움에서 분투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좋은 기도를 올릴 수 있다. “나는 이제 이러한 유혹과 싸워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여!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기도가 아니라 거룩한 결심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리라”고 해석한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대적하는 세력에 의해 오히려 더욱 강화될 것이다. 우리의 의무를 버리도록 하는 모든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성실히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어야 한다.
<느헤미야 7장 – 예루살렘의 치안>
- 하나님은 그의 교회에 관해, “예루살렘이여! 내가(하나님)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웠노라”(사 62:6)하고 말했었다. 느헤미야가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여기서 보게 된다. 살아 있는 파수꾼이 없이 죽은 성벽만은 도성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뽑아 각자의 직책을 행하게 했다. 이것은 모두 그들의 직책이 성전 일을 시종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다소 소홀히 행해졌었던 것이었으나, 다시 복구되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처소를 잘 방어하는 것이며, 그의 사역자들은-그들의 의무를 다하면-성벽의 파수꾼들이다. 또는 구체적으로 보면 그가 성벽을 지키라고 그들에게 명한 것은 그들의 성벽 헌당식을 질서 있고 엄숙하게 행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성벽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헌납식이 곧 그 성벽의 힘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헌납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된다. 그는 두 명의 총독 혹은 고문을 뽑아 그 성읍의 일을 맡겼으며, 나라의 평화와 안전을 책임지도록 했다. 예루살렘이 황폐했다는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에게로 온 그의 아우 하나니가 그 중에 하나였는데, 그는 자기의 조국에 대한 정직과 사랑을 지닌 자였다. 다른 한 사람은 하나냐였는데, 그는 바사 왕궁의 한 지도자로 있었던 자이다. 그는 적은 일에도 충성했으므로 더 큰 일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냐는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게 뛰어난 자라고 했다(2절). 이러한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두려워하며, 그 두려워하는 태도와 행실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자들도 있다. 그들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받는 존대함을(시 15:4) 두 배나 받을 자격이 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 선한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믿음과 그 경건함이 뛰어났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성실히 대하고 모든 일에 양심적으로 행함으로써 그 두려움을 증거해야 한다. 이처럼 뛰어난 덕을 지니고 있고 경건함과 정직함에 있어서 남보다 탁월한 자들이 하나님의 예루살렘을 다스리면 그 예루살렘은 번영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의 견해대로, 느헤미야는 이제 자기 임무를 다시 행하기 위해 바사 궁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으며, 그가 없는 동안 이 훌륭한 두 사람들에게 그 성읍의 일을 맡기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훌륭한 정치가들은 자기들이 직접 행할 수 없는 때와 곳에서는 자기들의 직무를 위임할 자들을 주의 깊게 찾아야 한다.
- 그는 문짝을 달고 성벽을 지키도록 명했다(3, 4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살펴보자. 예루살렘의 현황은 어떠했는가? 그 성읍의 땅은 넓고 컸다. 성벽은 이전과 같은 범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전에 비해 건축된 집은 거의 없었으므로, 매우 황폐한 채로 있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근래에 선지자를 통해 그것을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슥 8:3 이하) 믿는 가운데 성벽을 쌓았다. 비록 사람들의 수가 지금은 적었지만, 그는 증가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넉넉하게 자리를 잡고 성벽을 건축했다. 만일 그가 이것을 믿지 않았다면 그는 성읍 없는 성벽이 성벽 없는 성읍과 마찬가지로 매우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을 위해 느헤미야는 어떠한 배려를 취했는가? 그는 성읍 민장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명했다. 성문 곁에 서서 매일밤 성문이 잘 닫혔는지를 살피고 파수하도록 했다. 성문을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되면, 성벽은 소용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만사가 명료하고 평온한가를 확인하기 전에는, 아침에 성문을 열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명했다. 성벽 위나 다른 곳에 알맞게 파수꾼들을 배치하여, 적이 올 경우엔 그 위험성을 성읍에 필히 알릴 것을 명했다. 그리고 순번제로 파수를 할 때는, 자기 집 맞은 편에서 파수하게 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들로 하여금 특별히 주의해 지키도록 하기 위한 조치인 것 같다. 공공의 안전은, 각 개인과 각 가정이 공통의 적인 죄에서 떠나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데에 달려 있다. 파수하는 것은 각자의 유익을 위한 것이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그 자신의 이익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파수하는 자들을 임명하는 것이 다스리는 자들의 의무가 되고 만다. 이들은 얼마 전 성벽을 건축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듯이(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사업은 헛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제 성벽이 다 건축되었을 때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시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라”(시 127:1)는 것을 깨달았다.
<느헤미야 8장 – 율법의 해설>
-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고 교회를 교화시키기 위해, 거룩한 종교적 모임을 열어 선한 일을 행한 사건에 대해 읽을 수 있다. 이것을 행한 때는 제7월 1일 이었다(2절). 그 날은 안식일 이라고 불리우는 나팔절 이었으며, 성회가 열리는 날이었다(레 23:24; 민 24:1).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것은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후에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리기 시작한 날로서, 그 당시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감사히 기억하는 뜻에서 다른 절기보다도 더욱 성대하게 이 날을 지켰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새로이 하나님의 은총이 기억나면-우리는 직접 그러한 은총의 증인들이다-우리는 새삼스레 큰 감동을 받게 된다. 그것은 수문 앞 광장에서 행해졌다. 그곳은 넓은 공터로서, 성전 뜰에서는 모일 수 없을 만한 많은 무리들을 유치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 지은 성전은 솔로몬 시대의 성전과 같이 그렇게 대규모의 성전이 아니었던 것같기 때문이다. 제물은 성전 문에서만 드리도록 되어 있었지만 기도와 찬미와 말씀 선포 등의 종교적 행사는 다른 곳에서도 행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곳에 모인 자들은 백성 전체였다. 그들은 그곳에 오도록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일제히 동의하여 자발적으로 그곳에 모인 것이다. 그리하여 남자들 뿐만 아니라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자들이면 여자고 어린아이고 모두 모인 것이다. 집안의 가장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에 가족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 여자와 아이들도 구원받아야 할 자들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친숙해지고 하나님의 지식과 은혜를 받는 방편이 되는 일에 참예하도록 하는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지적인 훈련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훈련도 받아야 한다. 이 모임의 우두머리는 제사장 에스라였다. 즉 그가 이 의식을 주관했다. 하나님의 율법에 박식한 자보다도 더 설교하여 해설하는 데에 적합한 자는 없다. 그 의식에 대한 그의 소명은 매우 확실했다. 왜냐하면 그가 제사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고 율법학자의 자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백성이 그에게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였고, 그것을 그들에 읽어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1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셨고, 백성들은 그에게 기회를 주어 청탁을 했다. 지식은 그것을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요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영적인 자선금이다. 그의 자리는 매우 편했다. 그는 말씀을 위해 만들어 놓은(원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무강단 또는 대에 서서 말씀을 가르쳤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높은 자리에 선 것은 그가 말한 것이 좀더 잘 들려 은혜롭게 전달되도록 하고, 듣는 자들이 모두 그를 주목하여 누가복음 4장 20절에서와 같이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여러 명의 보조자가 있었다. 이들 중에 6명은 그의 오른편에, 그리고 7명은 그의 왼편에 서 있었다(4절). 이 강단은 특별석처럼 한 줄에 모두 그들이 자리잡도록 만들어졌거나[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거의 대(탑)라고는 부르기가 힘들다] 또는 한 단계 낮은 곳에 그들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놓았을 것이다. 그가 지쳤을 때는 이들에게 읽도록 명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이들을 보조자로 택하여 백성들 앞에 영예롭게 한 것은 적어도 다른 때 그들도 이와 똑같은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또 7절에 언급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은, 에스라의 가르침을 들으러 올 수 없었던 자들을 위해 그 근처에 있는 처소에 가서 율법을 읽어주고 해설해 주는 일을 동시에 맡았다. 이들 중에는 또한 입술에 지식을 지켜야 할(말 2:7) 제사장이 13명이 있었다. 이처럼 가르치기에 적합한 사역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은혜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보조자들을 지닌 에스라는 행복했고, 또 에스라와 같은 인도자를 지닌 그 백성도 행복했다.
- 이 집회에서 행해진 종교 행사는 의식상의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요, 기도와 설교였다. 이 집회의 사회자인 에스라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백성들의 입이었고, 그들은 마음을 다하여 그에게 협력했다(6절). 그는 여호와를 광대하신 하나님이라고 송축했으며, 그의 완전하심을 찬미하고 그의 은총을 간구함으로써 그를 영예롭게 했다. 또한 백성들은 그 간구와 찬미에 그와 한 마음이라는 것을 표하기 위해, ‘아멘, 아멘’ 하고 말했으며, 손을 들어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소망과 모든 기대를 표했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댐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경의와 복종심을 나타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선하심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으려 할 때는 우리도 이들처럼 하나님을 사모하고 우리 자신을 그에게 말씀드려야 한다.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었으며, 그들은 열심히 에스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것이야 말로 그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에스라는 율법 책을 가지고 회중 앞에 이르렀다”(2절). 그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정확한 율법 사본을 가지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는 훌륭한 관리인처럼, 그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모아 두었던 것을 이제 교회의 유익을 위해 놓았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율법 책은 율법 학자들의 연구를 위해서만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회중 앞에 들고 나와서 그들의 말로 읽어 주도록 되어 있는 책이다. 목회자들은 강단에 올라갈 때 성경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에스라가 바로 그러했다. 그리고 그 성경책으로부터 그들의 지식을 찾아내고 그 규례대로 말하며 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역대하 17장 9절을 보라. 그는 모든 백성의 목전에서 매우 경건하고 엄숙하게 그 책을 폈다(5절). 그는 그 책을 그들에게 알릴 때 그는 그 책을 자기들에게 준 하나님의 위대한 자비를 생각하면서 읽었다. 그는 그 책을 읽도록 허락해 준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그 책을 폈다. 그 책은 막힌 샘물이나 밀폐된 분수대가 아니었다. 우리는 책을 가지고 그 인봉을 뗄 때 기쁨과 찬미로 가득 찬 축복을 발견한다(계 5:9). 우리는 엄숙한 휴식기간을 가진 후에 믿음의 일을 시작하기를 배워 성급히 행하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책을 손에 들고 그것을 펼칠 때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고 또 우리의 무릎을 꿇어 기도할 때에도 그렇게 하도록 하자. 즉,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을 신중히 행하도록 하자(전 5:1). 그와 다른 사람들은 율법 책을 새벽부터 오정까지 읽어 주었고(3절) 또 그것을 ‘똑똑히’ (한글 개혁에는 없음) 낭독했다(8절). 종교적 집회에서 성서를 읽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요, 그것으로써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며 그의 교회는 교화된다. 그리고 특별한 때를 맞이하여 우리는 기꺼이 많은 시간동안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에 거의 참여해야 한다. 여기에서 이들은 이처럼 여섯 시간 동안 이 집회에 참여했다. 말씀을 읽고 설교하는 자들은 그들이 말한 것을 깨닫고 그것으로 감동을 얻은 자들로써 그 말씀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을 배워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들에게 말씀을 깨닫고 기억하게 하며 또한 감동을 얻게 하도록 하자. “거룩한 것을 삼키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의 덫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