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12장 – 성곽의 건축>
- 우리는 예루살렘 성벽이 매우 큰 위협과 공포 가운데 건축되었다는 것을 읽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기쁘고 활기차게 봉헌식을 갖는 것에 대해 읽게 된다. 눈물 가운데 씨뿌린 자는 이처럼 거둘 것이다. 우리는 이 성곽의 낙성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그 성읍의 봉헌식도 역시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성읍이 아주 풍성히 채워지기 전에 이 봉헌식은 행해지지 않았다(11장).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사업을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은혜로 돌봐주신 그의 큰 긍휼에 대해 엄숙히 감사드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많은 어려움과 방해 속에서 이 일을 이루었으므로 그의 은혜를 더욱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영예를 위해 특별히 그 성읍에 봉헌했고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위해 그 성읍을 점유했다. 우리의 모든 성읍과 모든 집들은 여호와께 거룩히 봉헌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성읍은 다른 성읍들과는 달리 ‘거룩한 성, 큰 왕의 성’ 이었다(시 48:2; 마 5:35). 그 성읍은 하나님께서 그 곳을 택하여 그의 이름을 놓이신 이래로 항상 그러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것을 다시 중건했을 때 건축한 자와 거민들은 하나님께 새로이 봉헌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이 그의 소작인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또 그것이 언제나 그의 것이길 바라며 그 소유권이 결코 변경되지 않기를 원하는 그들의 소망을 표했다. 그들의 안전이나 편함, 그리고 즐거움을 위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계획된 것이라야 한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성벽의 건축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성읍과 성벽을 그 거룩한 보호 아래 두고자 했다. 이 성읍이 여부스 사람들에게 점령되었을 때 그 사람들은 그들의 신이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그들을 지켜주리라 생각했었다(삼하 5:6).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여부스 사람들 이상으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그 성의 보호를 의탁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신적인 태도로 성읍을 건축하는 자들은 천체의 운행을 염두에 두고 일했다. 그러나 이 믿음이 깊은 건축자들은 하나님께만, 즉 그의 섭리만을 마음에 두었을 뿐 행운에는 개의치 않았다.
- 우리는 이것이 느헤미야의 지휘 아래 어떻게 엄숙히 행해졌는가를 살펴보자. 모든 지역에 있는 레위인들을 불러 참석하도록 했다. 그 성읍은 하나님께 봉헌되어야 했으므로 그의 종들이 그것을 봉헌하는 일을 담당하여 성읍을 그들의 손에서 인수받아야 했다. 엄숙한 절기들이 끝났을 때(8, 9장)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각자의 위치를 지켰고 그들의 직분에 관심을 기울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곳에 와 돕도록 요청 받은 것이다. 이 소집을 기하여 모든 레위 사람들의 총회합이 열렸다(28, 29절). 그들이 어떤 과정을 밟았는가 살펴보자. 그들은 몸을 정결케 하였다(30절).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할 때, 손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정결케 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이 몸을 정결케 한 후 백성들도 그렇게 했다. 다른 사람을 정결케 하도록 만들려는 자들은 먼저 그들 자신을 정결케 하고 순결한 마음과 신실한 뜻을 가지고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하였다. 우리는 즐거움을 받을 준비를 해놓고 위안을 기다려야 한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딛 1:15). 그리고 성결케 된 자들에게는 집이나 식탁 그리고 그들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의 산물들도 성결하다(딤전 4:4, 5). 그들은 아마도 ‘정결케 하는 물’을 그들과 백성, 성문과 성에 뿌림으로써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모형으로서 우리의 양심이 바로 그 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되었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하고 그의 보호를 받기에 합당하게 된다(히 9:14). 방백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레위인들이 악기로 연주하면서 두 패로 나뉘어 성 위로 올라갔는데 이것은 그 모든 성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표시였다(36절). 그러므로 그들은 성 위를 올라갈 때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광 돌리기 위해 찬송가를 불렀던 것 같다. 그 행렬이 여기에는 장황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일정한 장소에 모여서 두 패로 나뉘어 갔다. 방백들의 반수는 몇 명의 제사장, 레위 사람들과 함께 오른쪽으로 올라갔고 에스라가 그들 앞에서 인도했다(36절). 그 나머지 절반의 방백들과 제사장들도 역시 감사 찬송을 부르면서 왼쪽으로 올라갔고 느헤미야가 그 후열에 섰다(38절). 드디어 그 두 패는 성전에 모여 함께 감사 찬송을 드렸다(40절). 백성들의 무리도 일부는 이 성 안쪽을, 다른 일부는 바깥 쪽에 있는 평지를 걸었고 한 가지 예식이 끝났을 때는 모두 하나님의 긍휼에 감동되어 감사를 드리고 그것을 영원히 기억에 남기고자 했던 것 같다. 그들의 행렬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졌던 것이다. 백성들은 심히 즐거워하였다(43절). 방백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레위 사람들이 "크게 제사를 드리고 나팔 불고 악기를 연주하며 찬송함" 으로써 그의 즐거움과 감사함을 표했을 때 일반 백성들은 크게 외침으로써 그들의 기쁨과 감사를 표했다. 이 외침은 그 어느 조화된 노래나 악기 소리보다도 더 멀리 전달되었다. 충심으로 기뻐하는 가운데 나온 이 외침이 여기에서 주목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의 외침은 어떤 기교도 없었고 세련되지도 못했지만 하나님은 이 낮은 백성들의 정직하고 열의 있는 마음을 은혜롭게 받아주셨던 것이다.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다”는 것도 여기에서 주목되고 있다. 즉 그들의 호산나 소리는 무시되지 않고 그들의 찬미로 기록되었다. 공적인 긍휼을 나누어 가진 자들은 공적인 감사를 드리는 데 모두 참가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뻐할 일과 즐거워할 수 있는 마음 그 두 가지를 모두, 다시 말해서 그의 섭리가 그들을 안전하고 편하게 만드셨고, 또 그의 은혜가 그들이 기뻐하고 감사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들의 적들이 훼방한 일은 물론 그들의 기쁨을 더해 주었고 또 승리감마저 갖게 해주었다. 위대하신 긍휼은 예루살렘 가운데 있는 여호와의 전 뜰에서 엄숙한 찬미로 보답할 것을 요한다.
<느헤미야 13장 – 이방인 축출>
- 이스라엘이 독특한 백성으로서 보존되어 왔으며, 열방들과 섞이지 않고, 또 그 누구도 그들과 결합되는 것을 묵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자랑이었고, 그들의 성결을 보존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읽을 수 있다. 그러한 목적으로 율법을 그 날에 낭독하여 백성들에게 들렸다(1절). 즉 그들은 성곽을 낙성했던 날에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그 말씀을 읽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3절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른 슬픈 일들은 느헤미야의 힘으로 제거되었지만, 그후 오랜 기간이 지난 지금 이 섞여 사는 무리들은 백성들 스스로의 힘으로 제거할 수 있게끔 되었던 것 같다. 또는 이것은 성곽이 낙성된지 몇 해 후 그 기념일이 된 날이고, 그래서 ‘그 날에’ 라는 단어로 표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이스라엘인이 될 수 없으며 그들 가운데 거할 수도 없고 연합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율법책에서 발견했다(1절).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해하려는 악한 성품을 품고 있으며(2절),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행한 잘못을 특별히 용서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게 일상적인 경의조차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멸하려 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이유가 적힌 율법을 신명기 23장 3-5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성들은 이 율법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3절). 하나님의 말씀을 공통으로 읽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가를 보라. 우리가 이 말씀에 열중할 때, 우리의 죄와 의무, 선과 악이 드러나게 되며, 우리가 잘못한 것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붙어 있던 악을 떨쳐 버릴 때, 우리는 말씀을 깨달음으로 인한 유익을 얻게 된다. 그들은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하였다. 그들은 옛부터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되어 왔었다. 왜냐하면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기 때문이었다(민 11:4). 이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횡령자요, 해로운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추방당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도비야의 특별한 경우가 언급되어 있다. 그는 암몬 사람이었다. 느헤미야가 이 율법(1절)과 그 이유(2절)를 낭독케 한 저변에는 아마 이 도비야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게 악의를 품고 있었고, 암몬 사람들의 기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의 분노는 느헤미야에 의해 목격된 바 있었고(2:10), 그는 느헤미야의 일을 방해한 일도 있었다(4:7, 8). 다음을 살펴보자. 제사장 두목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성전 뜰안에까지 거하게 했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엘리아십은 처음에는 결혼에 의해, 그 다음에는 우정에 의해, 도비야와 친분을 맺었다(4절). 그의 손자는 산발랏의 딸과 결혼했다(28절). 아마 그의 가족 중 다른 사람도 도비야의 가족과 결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었고, 또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제사장은 도비야의 가문과 동맹을 맺는 것을 영예로 간주하여,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대제사장은 자기 백성 중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자손으로 백성들을 더럽히게 된다”는 것이 율법에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레 21:14, 15). 엘리아십이 암몬, 곧 ‘종’ (도비야는 그렇게 불리워지고 있었다)과 동맹을 맺고서, 자기가 한 일을 자랑스레 생각했다. 그것은 아마 도비야가 지혜롭고 도량이 넓은 사람이며 훌륭한 자라고 칭찬을 받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6:19).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감히 성별된 그 면류관을 짓밟아 버리게 되었고, 이러한 소식은 아무도 원치 않았으나 가드에 전해지게 되고 아스겔론 거리에 퍼지게 되었다. 그가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가 도비야와 친숙히 사귀어 왔음에 틀림이 없다. 도비야는 사업하는 자였으므로 자주 예루살렘에 머물렀는데, 나는 그가 어떤 선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엘리아십은 그의 새 친족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와 사귀는 것을 즐겼으며, 될 수 있으면 그와 가까이 있으려 했다. 성전 뜰에는 도비야가 거처할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골방으로 사용되던 여러 작은 방들의 간막이를 치워 큰 방으로 만듦으로써 도비야의 전용 거실을 마련해 주었다(5절).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비열한 일을 행했다. 그는 암몬 사람인 도비야가 이스라엘에게 존경받고 또 거창한 대우를 받도록 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훌륭한 모범을 보여야 하는 대제사장인 그가 율법을 어겨 그를 환대했다. 그리고 성전 골방을 감독하는 직분을 맡고 있던 그가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의 권한을 남용했다. 그는 마치 하나님에게 도전이라도 하려는 듯, 도비야를 하나님 전 뜰에 거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사악한 옛왕들이 행한 것과 같이 그곳에 우상을 세웠다. 암몬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런데 암몬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악하고 비열한 자가 어떻게 성전에 들어와 환대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는 도비야의 방을 마련하기 위해 성전에 쌓아둔 물건들을 치워버림으로써, 그것들이 손실되고 파괴되어 허비되게 했으며 또 횡령했다. 비록 그것들이 제사장들에게 돌려진 것이었지만, 그는 도비야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그렇게 처분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말라기가 그 당시에 책망한 것과 같이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다(말 2:8). 느헤미야가 “그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었다”고 덧붙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6절). 만일 그가 그곳에 있었다면 이 대제사장은 감히 그런 일을 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밭에 가라지를 뿌리려고 노리는 자는 기회를 포착하는 비결을 알고 있어, 종들이 잘 때 나 없을 때 그 일을 행한다(마 13:52). 모세가 산에 있을 때 금송아지가 만들어졌던 것도 바로 이러한 때문이었다.
- 방백의 두목 느헤미야는 도비야와 그에게 속했던 물건을 추방시키고 그 골방을 원상태로 복구시켜 놓는 용감한 일을 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선한 백성들에 의해 그들의 제사장 두목과 적의 두목이 친숙해짐에 따라 자기들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심히 근심하였다(7, 8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이 매우 더럽혀졌고, 그의 적들이 이처럼 옹호되고 신뢰되고 있어, 그 성전의 보호자이며 후원자이신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배반당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하나님의 전의 일꾼들이 사악한 일을 행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보다 선한 백성들과 선한 치리자들에게 더 슬픈 일은 없다. 느헤미야는 권력을 잡고 있었으며, 그는 하나님을 위해 그 권력을 사용했다. 도비야는 추방되었다. 도비야의 뜻을 거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느헤미야는 그의 분노나 엘이라십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한 대제사장의 관할에 속해 있는 일을 간섭한 것에 대해서도 미안하게 여기지 않았다. 느헤미야는 선한 일을 열심히 사모하는 자였으므로, 도비야의 모든 세간을 내어던짐으로써, 그 침입자를 내쫓았다. 느헤미야는 그 물건들을 자기가 지니지 않고 모두 내어 던졌다. 이 때에는 아마 도비야가 밖에 나가고 없었을 것이며,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그 곳에서 다시 대접을 받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구주께서도 이처럼 성전을 깨끗케 하여 기도하는 집이 도둑의 소굴로 되지 않도록 하셨다. 살아 있는 성전 곧 마음 속에 있는 죄를 쫓아내려는 자들도, 이와 같이 그 죄에 관련된 모든 세관과 모든 양식을 내어버림으로써 죄가 헐벗고 굶어죽도록 해야 하며, 탐욕의 먹이와 연료가 되는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 이것은 사실상 그 죄를 죽이는 것이다. 성전 곳간을 다시 들여 놓고, 하나님의 전의 기명을 그리로 들여 놓았다. 그러나 골방들은 더럽혀졌기 때문에 정결케 하는 물을 뿌려 깨끗하게 해야 했다. 이처럼 회개를 통해 죄를 마음에서 내어 쫓고 나서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피를 그 위에 뿌리고, 그 다음에 매일의 선한 사업을 위해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그 곳을 채우도록 해야 한다.
<에스더 1장 – 아하수에로>
- 이 아하수에로 왕은 바사 왕 중 어느 왕을 말하고 있는지 학자들 간에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다. 모르드개는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사로잡혀 온 자들 중 한 사람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2:5, 6) 이 아하수에로는 그 제국의 첫 번째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그가 성전 건축을 방해했던 아닥사스다(스 4:6, 7)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메대 족속이었던 그의 증조부의 이름을 좇아 또한 아하수에로 라고 불리웠기 때문이다(단 9:1).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다리오와 고레스는 단지 120도를 다스렸으나(단 6:1) 그는 인도에서 구스(에티오피아)까지 이르는 127도를 다스리고 있었다(1절). 대개 과대 팽창한 나라는 그 무게에 눌려 쇠퇴하고 그것을 점령하던 때와 같이 급속도로 그것을 잃게 되기가 쉽다. 만일 그 거대한 권력이 악한 손아귀에 들어 있다면 그 재앙은 그만큼 더욱 큰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선한 손에 있다면 그만큼 더욱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그리스도의 것이 될 때 그의 왕국은 지금보다 훨씬 커질 것이고 그것은 영원한 왕국이 될 것이다. 그의 왕국은 매우 화려하고 장엄했다. 그의 보좌가 견고케 된 것을 안 그는 그의 왕국이 웅대해질수록 더욱 마음이 교만해져 갔다. 또한 그는 극히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었으며 단지 그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지출했다(4절). 그것은 헛된 영광이었고 전혀 쓸데없는 허례허식이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왕국의 부함을 의심하지 않았고 또 그와 영예를 다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그의 몇 후계자들과 같이 성전을 건축하고 그 일을 유지하는 데에 그 왕국의 부함과 그의 영예로운 권세를 나타냈다면(스 6:8; 7:22) 그것은 훨씬 더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 아하수에로 왕은 두 가지 잔치를 베풀었다. 즉, 한 가지는 귀족과 방백들을 위한 것으로 ‘일백 팔십 일’ 이나 계속되었다(3, 4절). 그는 이 모든 기간 동안 똑같은 사람들을 매일 초대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한 지방의 귀족과 방백들을 각각 하루씩 초대하였을 것이며, 그러는 동안 그와 그의 시종인들은 매일 호화스런 잔치를 즐겼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잔치는 대소 인민을 위한 것으로 칠일 동안 베풀어졌다. 하루하루의 잔치에서 각 백성들을 교대로 초대했는데 그들을 맞아들일 집이 없어서 왕국 후원 뜰에서 잔치를 베풀었다(5절). 장소를 여러 개로 나누기 위해 쳐진 휘장이나 참석한 무리를 위해 마련한 장막은 매우 화려하고 값진 것이었다. 그들이 앉은 침상이나 걸상도 그러했고 그들의 발 아래 있는 보도도 역시 그러했다(6절). 온갖 소음으로 시끄러운 이 포도주의 연회석보다는 조용한 가운데 나물 음식을 먹고 한적하게 다정한 친구와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는 훌륭한 질서가 잡혀 있었다. 우리는 벨사살 왕이 잔치석에서 잡신들을 찬미하고 성소의 기명들을 더럽힌 일(단 5:3, 4)들은 여기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갈데아 해설판에는 성소의 기명들이 이 잔치에서 사용되어 유다 사람들을 매우 근심케 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선지자의 머리를 마지막 접시에 담아오기를 요구하는 헤롯의 잔치와는 달랐다. 우리는 이 잔치에서 두 가지 일을 칭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억지로 축배를 들거나 권유하지 않았다. 마시는 것도 법에 따라 했으며 (아마도 이것은 근래에 만들어진 법규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으로 억지로 하지 않게 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계속 마시기를 권유하지 않았다고 조세푸스는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술잔을 돌리지 않았으나 모든 사람이 각자의 취향대로 마셨다(8절). 그러므로 만일 지나치게 마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실수였다. 그러나 왕이 절제를 귀히 여기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는 자는 거의 없었다. 이 이방 나라 왕은 그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가운데에도 이러한 경고를 잊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살펴볼 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나 친구들을 취하게 만들지 않고서는 그들의 행복한 가정을 보여주지 못하고 또 그들을 초대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축배를 든다는 구실 아래 죽음을 담은 죄악의 잔을 돌리는 많은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하박국 2장 15, 16절을 읽고 경계하도록 하자. 그들은 그 친구들의 이성(理性)과 가장 귀한 보배를 훔치는 자이며 그들을 가장 어리석고 가장 약한 자로 만드는 자이다. 그곳에는 난잡한 춤이 없었다. 즉 신사와 숙녀들은 따로 대접을 받았으므로 벨사살 왕의 잔치 때처럼 아내와 첩들이 그와 함께 술을 마시는(단 5:2) 일은 없었다. 또한 헤롯의 잔치 때처럼 딸이 그 앞에서 춤을 추는 일도 없었다. 와스디는 따로 부녀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그것은 개방된 왕국 뜰에서가 아니라 왕궁에서 행해졌다(9절). 왕이 이처럼 그의 영예로운 위엄을 보여 주었을 때 왕비와 그 여인들도 그들의 정숙함을 보여 주었는데 이것은 여성들이 갖추어야 할 참된 위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