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6 – 엘리후의 연설>
- 하나님을 대변하여 말하려고 하고 자기 조물주께 특별히 의로움을 돌리려 하는 엘리후가 이 문단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신의 섭리의 조처란 모두 신의 의지가 하고자 하는 영원한 계획에 의거하여 베푸시는 것이며, 영원하신 공평의 법칙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치리자로 행동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그의 수하인들 중 가장 비천한 자에게 주목하는 일을 가치없다고 생각지도 않으시며, 곤궁한 자나 미미한 자들이라 하여 자기 은총에서 멀리 떼어놓지 않으신다. 만일 강력한 힘이 있는 인간이라면 저명하거나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에게는 거만하게도 경멸의 눈길을 주기 쉬우나,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무한한 능력이 있으시면서도,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신다”(5절).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낮추사 가장 비천한 자의 일까지도 심리하시고, 그들에게 공평을 베푸시며 인자하심을 나타내 보이신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즉각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으신다고 하여, 자기 자신과 자기의 일이 등한히 여김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엘리후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시치 않으십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은 우리가 왜 누구든지 존경해야 하는가 하는데 대한 이유가 된다. “그는 힘과 지혜에 있어 능력이 크시나” 정직히 꾀하는 자들이면, 힘과 지혜가 보잘 것 없는 자들이라 하여도 무시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이 이런 이유 때문에 아무라도 멸시하지는 않으시는데, 그것은 그의 지혜와 힘이 버금할 것이 없도록 무한하심으로서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 은혜를 겸손히 베푸신다고 해서 그에게 감소되는 것은 없다. 현명하고도 선량한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에게도 냉소와 경멸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 하나님은 아무리 위대한 자들이라도 악한 사람들이면 편들지 않으신다(6절). “그는 악인을 살려 두지 않으신다.” 악인들의 생명이 연장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특별히 베푼 보살핌 아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섭리의 일반적 보호하에서 그런 것일 따름이다. 욥은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다”고 말했다(욥 21:7). 그러나 엘리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만에, 하나님이 악인들을 장수하도록 허용하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의 생명을 그들이 기대한 만치는 오래도록 보존하지도 않으시며, 참으로 우리의 생명이라고 할 만한 그 위로와 만족으로써 저들을 살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더욱이 그들을 보존해 두시는 것은 진노하심의 날을 위한 예비에 불과합니다”(롬 2:5). 하나님은 조금이라도 피해입은 자들에게 언제든지 기꺼이 신원해 주실 준비가 돼있으시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즉시 옹호해 주신다(6절). “그는 고난받는 자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그들의 박해자들에 대한 그들의 불평을 복수해 주시사, 그들의 박해자가 강탈해 간 모든 것을 되려 보상해 주도록 강제권을 발동하신다. 사람들이 피해 입은 불쌍한 자들을 정당하게 회복시켜 주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이 신원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선량한 백성들을 보호하는 데 특별하신 배려를 해 주신다(7절). 그는 그들을 내려다 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도 않으신다. “그는 그 눈을 의인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신다.” 그들이 때로 소홀히 취급당하는 것 같고, 망각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이 간과해 버리는 것 같으나, 그들의 하늘 아버지의 자상하신 시선은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고 계신다. 만약 우리의 눈이 의무 가운데서 늘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시선도 자비하심 가운데에서 우리 위에 머물러 계신다. 우리가 가장 낮은 데 처하여 있을 때에라도 그의 눈은 우리를 빠뜨리지 않고 바라 보신다.
<욥기 37 – 창조주의 교훈>
- 천둥과 번개는 보통 함께 일어 나는데 하나는 귀에, 또 하나는 눈에 감각을 준다. 그것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 권능과 두려움에 대한 지각할 수 있는 증좌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크심을 증거하지 아니한 채 스스로 방임하시지는 않으시는데, 이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내리는 비와 열매를 많이 내는 계절을 통하여 자기의 인자하심을 가장 우둔하고도 지각없는 자들에게까지 증거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방임하지는 않으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비록 거기에는 과학자들이 그 까닭을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자연의 원인과 그 결과가 있다고는 하나, 주로 창조주께서 잠자고 있는 인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며 각성시켜서 그들 인간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려는 창조주의 의도가 있는 것같이 보여진다. 눈과 귀는 두 개의 배우는 감각기관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런 경우가 있음직 하기는 하나 실제로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에다가 귀머거리인 사람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신의 교훈은 귀를 통해 마음으로 전달되며, 눈을 통해서는 그의 작품인 자연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교훈이 전달된다. 그러나 저 일상적인 장면이나 음향은 인간에게 적절한 감화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번개불로써 그 인간들의 눈을 놀라게 하기 좋아하시며, 천둥으로써 인간의 귀를 놀라게 하시기를 즐거워하신다. 엘리후가 말하던 그 때에 천둥이 치고 번개가 빛났다고 하는 추측은 매우 그럴 듯하다. 왜냐하면 그가 그 현상을 현재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지식의 완전성, 그가 지혜에 있어서 온전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스런 완전성 중의 하나이다. 그는 전지하시다. 그의 지식은 직관적이시다. 그는 눈으로 보시며 풍문으로 알지는 않으신다. 그의 지혜는 소상하며 전체적이다. 그는 사물을 사실대로 알고 계시며, 외관으로 알고 계시는 게 아니다. 철저하게 속속들이 아시고, 부분적으로 조금 알고 계신 것이 아니다. 그의 지식에는 먼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가까운 것 뿐이다. 미래적인 것은 없으며, 전부가 현재적이다. 숨기워진 것은 없고 전부가 개방적인 지식이다. 우리는 그의 모든 기묘한 일들 가운데에서 이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들이 자기가 하는 행위를 알고 있는 분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의미를 알지 못하는 그 기묘한 일들 안에 있는 우리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 지식의 불완전함.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도 자연의 능력과 일에 대해 어두운 점이 많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역설적인 존재이며, 우리에 대한,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신체들의 중력과 물질의 부분들의 응집은 확실한 현상이나,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무지를 고백하였는데,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 무리들은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정책에 대하여 얼마나 무능한 재판관인가 하는 사실을 추리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하나님의 공학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극소수이겠는가
<욥기 38 – 말씀의 주체>
- 누가 말씀하시는가 살펴 보자. 말씀의 주체자는 즉 여호와이시다. 그는 피조된 천사가 아니시며, 영원하신 말씀 자체이시고 이 영원하신 말씀은 복되신 삼위 중 제2위 이시다. 왜냐하면 세상이 만들어진 것은 그로 말미암아서 된 것이며, 그는 다름아닌 성자이시기 때문이다. 후에 시내산에서 말씀을 내린 바로 그분이 여기에서도 말씀하고 계신다. 시내산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시겠다는 말로 시작하셨으나, 여기에서는 천지 창조의 말씀으로 시작하시는데, 이 양자로부터 우리의 그분에 대한 복종의 필요성이 추리되어진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되 인간은 그것을 알아 듣지 못한다”고 말하였다(33:14). 그러나 그들은 지금하시는 이 말을 알아 듣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다(벧후 1:19). 그가 말씀하신 시기를 살펴 보자. 그가 언제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그 때’이다. 그들이 그들의 할 말을 죄다 하고도, 오직 그들의 요점을 얻지 못하였을 때, 그 때는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이다. 이는 그의 판단은 진리에 의거하시기 때문이다.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을 때,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옳은지 그른지 의심스럽다고 생각될 때에는 “하나님이 판결의 골짜기에서 즉각 결정해 주시리라(욜 3:14)”는 이 말씀이 우리를 흡족하게 해 주신다. 욥은 자기의 세 친구를 침묵시키기는 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주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대해서는 그들을 납득시킬 수가 없었다. 엘리후는 욥을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욥이 이 논쟁을 그릇되게 처리한 사실을 자인하게는 유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나오셔서 이 두 가지 일을 다 행하신다.
- 하나님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지으신 자요, 주신 자며, 또 그것들의 아버지요 근원이시다(36절). 인간의 혼은 하늘의 별들 자체보다 더 고귀하고 훌륭한 존재이며, 더욱 밝게 빛이 난다. 인간에게 부여된 이성의 능력과 기능은 인간의 놀라운 사고 행위와 함께 자신을 복된 천사들과 어떤 연합을 이루게 한다. 그런데 이 빛은 빛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오겠는가? 그 외에 “누가 인간의 내부에 지혜를 넣어 주셨으며, 마음 속에 총명을 넣어 주었느냐?” 합리적 즉 이성적 영혼 그 자체와 그것의 기능은 자연의 하나님으로서의 그에게서 유래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안에서 인간의 영을 형성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만들지도 않았고, 영혼이 어떻게 행동하며 그들이 육체에 어떻게 연합돼 있는지 묘사할 수도 없다. 영혼을 만드신 그 분만이 영혼을 아시며 그들을 어떻게 다루실지 그 방법을 알고 계신다. 그는 인간의 마음들을 어떤 것 안에 담아서 똑 같이 만드시나, 다른 것 안에 담으시면 같지 않게 만들어 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