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2 – 겸손한 고백>
-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고 합리화시키던 욥의 말은 31장 40절에서 끝이 났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의 우행과 무모한 언사에 대하여 철저한 겸손을 나타내며, 또 그는 그 죄를 용서받는다. 선량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행하도록 하려면 다소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들도 필경은 자기들의 과오를 깨닫고 그 잘못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피조물 속에 나타난 자기 자신의 크심과 권능을 모두 욥에게 말씀하신 즉 “욥은 그제서야 여호와께 대답하였다(1절).” 곧 반박이라는 형태로서가 아니라(그는 대답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했었다. 40:5), 순종의 모습으로 대답하였다. 우리도 이와 같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권세와 지식과 통치가 무제한적이란 진리에 동의를 표하여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에서 말씀하신 말씀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증명하고자 하였다(2절). 썩어빠진 정열과 부정한 행위는 어떤 부패한 원리로부터 발생하거나, 아니면 진리의 원리에 대한 불신과 태만에서 기인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진리의 인식”에서 출발한다(딤후 2:25). 욥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위대성과 영광 및 온전하심에 대해 확신을 얻은 자기 판단을 고백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당연히 귀결되는 것은 하나님께 불경스레 발언함으로 나타내 보인 욥 자신의 철없는 행위에 관하여 그의 양심이 내리는 유죄 판결이다.
- 그는 하나님께서 무슨 일이든 행하실 수 있다고 고백한다. 하마와 악어를 만드신 분이며, 또 그들을 자기 마음대로 요리하실 수 있는 분에게 어려워서 할 수 없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는가? 그는 이 사실을 이전에도 알고 있었고, 그 문제에 대해 아주 잘 표현해 왔었지만, 이제는 마음을 쏟아 그 일을 깨닫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권세가 자기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한 번 말씀”하셨는데도 그는 그것을 두 번 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다툰다는 것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 중 가장 미친 짓거리이며, 엉터리없는 행동이다. “주께서는 무소 불능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께서는 이 비천한 상태로부터 나를 끌어 올리실 수 있으십니다. 나는 어리석게도 나의 이 비참한 상태가 개선된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자포자기해 버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당신께서 이 일을 행하실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욥은 자기의 회개 중에 하나님께 눈을 돌리고 하나님을 존중하게 되었으며, 그 태도를 자기 참회의 근본 원리로서 견지해 나갔다(5절).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위험을 대면하면 할수록 우리는 죄의 비열함과 밉살스러움을 더 보게 되며, 죄악 때문에 우리 자신의 악함과 가증스러움 또한 더욱 더 알 수 있게 되고, 그로 인해 우리는 더욱 더 우리 스스로를 격하시키며 증오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교만한 자들을 발견해 내어 그들을 비하시키라”고 촉구하셨다(40:11, 12). “제가 그 일을 해 낸다고는 흉내조차 낼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제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꺾어 겸손하게 하며, 비천하게 하고, 낮추는 데는 충분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심령을 잘 지배하는 일만은 그의 은혜의 힘 안에서 우리의 본령으로 삼도록 하자.
<시 1 – 복 있는 사람>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한다.” 그는 그들의 모의에 참석치 아니하며 그들과 의논하지도 않는다. 아무리 그들이 재치 있고 민첩하며 학식이 있다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다면 그들은 그의 상담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저희의 결의에 가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눅 23:51) 저희처럼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들의 원칙에 의해 행동하지 않으며 그들이 주고 받는 충고에 따라 행하지도 않는다. 경건치 못한 자들, 즉 악인들은 믿음에 위배되는 충고를 하기에 서슴치 않으며 그것은 매우 교묘하게 다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그것에 물들거나 사로잡히기 않게 되는 것을 스스로 다행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 그는 그들처럼 행하지 않도록 피한다. 그들의 길이 그의 길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그 속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는”(36:4) 죄인처럼 그 속에 계속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가능한한 그들이 있는 곳을 피한다. 그가 그들을 닮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교제하려 하지 않으며, 그들을 그의 동료로 택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들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그들의 길에 서지도 않는다(잠 7:8). 그는 감염될까 두려워하며 역병에 감염된 사람이나 장소로부터 멀리 피한다(잠 4:14, 15). 해를 받지 않으려는 자는 해로운 길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 그는 악한 자리에 편히 앉아서 자신의 마비된 양심을 즐기는 자들과 함께 쉬지 아니한다. 그는, 마귀의 나라를 돕고 발전시키기 위한 방법과 수단을 찾아 철저히 음모를 꾸미거나 의로운 세대들을 정죄하기 위해 강압적인 태도로 공개 재판석에 앉아 있는 자들과 사귀지 않는다. 취한 무리의 자리는 오만한 자의 자리이며(69:12), 결코 그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는 행복한 자이다(호 7:5).
- 경건한 자의 행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심어졌다는 것이다. 이 나무들은 본래 들감람나무였으며, 그것들이 새로 접목되고 하늘로부터의 능력에 의해 심어질 때까지는 그러한 나무로 머물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나무라 할지라도 저절로 자라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여호와가 심으신 나무’이므로 그는 그 속에서 영광 받으셔야 한다(사 61:3). 그가 은총에 의해 자라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한 자는 힘과 권력을 공급받으나 그것은 분별할 수 없는 은밀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의 행실은 유익하도록 번성한 과실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빌 4:17). 하나님은 제일 처음 축복하신 자들에게 “생육하라”(창 1:22)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생육에서 오는 즐거움과 영예는 그 수고의 보답이 되고 있다. 은총의 자비를 즐기는 자들에게는 마음의 평정과 생활의 지침에 있어서 그 은총의 의도에 순응하여 과실을 맺을 것이 기대되어 진다. 그리고 포도원의 훌륭한 일군에 대한 찬사를 살펴보면, 그들은 선을 행하되 합당한 때에 행할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유용한 과실을 (그들에게 요구되는) “시절을 좇아” 맺는다. 그의 사업은 손상되거나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잎사귀 또한 마르지 아니할 것이니라.” 사업에 있어서 유익한 과실이 없이 잎만을 내는 자들에게는 그 잎마저 마를 것이며, 그들은 그 사업을 자랑했던 것만큼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 속을 다스린다면 그것은 그 사업을 푸르게 하며 우리에게 위안과 신뢰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렇게 획득된 월계수들은 결코 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그것은 그가 바라던 대로 또는 그 이상으로 형통할 것이다.
<시 2 – 그리스도의 적>
-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 왕국을 들러싼 매우 큰 투쟁, 그것을 얻기 위한 지욱과 천국의 투쟁을 볼 수 있다. 그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이 땅이다. 이 곳에서 사탄은 오랫동안 왕국을 찬탈해 왔으며, 그는 우리가 호흡하는 그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신’이라 불리울 정도로 이 땅을 강하게 지배해 왔다. 그 사탄도 메시야의 왕국이 일어나 자리잡을 때는 그가 몰락하고 땅을 잃게 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세워질 것이며, 절대로 나약하게 세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메시야와 그의 나라에, 그의 거룩한 믿음과 그 모든 유익에 대한 강한 도전이 있을 것이다(1-3절).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부여되는 그처럼 큰 축복이 보편적으로 환영받고 받아들여질 것이며, 각 단마다 그 메시야의 축복에 즉시 고개를 숙이고 땅 위의 모든 면류관과 왕홀은 그의 발 아래 바쳐질 것을 기대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반대로 나타난다. 어떤 부류에 속한 철학자들의 견해가 아무리 어리석은 것이라 할지라도 또한 어떤 왕이나 국가의 권력이 아무리 포악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교리와 그 통치권처럼 강력히 도전당한 적은 결코 없었다. 이것은 바로 그것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는 신호이다. 왜냐하면 그 도전은 근본적으로 지옥으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여기에서 누가 그리스도의 적대자로 나타날 것이며 누가 마귀의 도구가 되어 그이 나라에 도전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왕과 백성들, 궁궐과 나라가 때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 분리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 다시 연합한다. 강대한 자들만이 아니라 군중들, ‘열방’, ‘민족들’의 무리들과 단체들도 연합한다. 그들이 일반적으로 자유를 좋아할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선포하고 마련하신 자유를 싫어한다. 군중들 뿐만 아니라 유력한 자들(우리는 이들 중 어느 누가 좀더 신중히 생각하고 잘 판단해 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까지도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폭동을 일으킨다.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의도가 조금도 없고 만일 그들이 원한다면 매우 원만하게 그것을 강화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은 즉시 무장을 하고 일어선다. 여자의 후손에 대해 뱀의 후손이 지니고 있는 옛 적대감의 결과를 보고, 인류의 타락이 얼마나 보편적이며 해로운 것인가를 보라. 그들은 무수하고 그들은 유력하다. 여기에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열방’이라 칭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들 조상의 믿음과 거룩함을 버리고 매우 비참하게 타락해 버렸다. 그들은 크리스찬들을 박해하도록 열방, 즉 이방인들을 선동한다. 블레셋 사람들과 그 방백들, 사울과 그 신하들, 그리고 불만을 품고 있는 무리들과 그 주동자들이 면류관을 향해 오는 다윗에게 도전한 것과 같이, 해롯과 릴라도,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사람들 속에 자리잡은 그의 세력을 대적하기 위해 그들의 온갖 힘을 기울였다.(행 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