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9 – 감사의 찬미>
-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그리고 그가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게 행해 주신 위대일들에 대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다(1,2절). 하나님은 그가 놀라우신 역사를 베풀어 주신 자들로부터 그것에 합당한 찬미를 기대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기꺼이 찬미하려 한다면 우리는 성실하게, 우리 마음으로, 우리 입술만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의무를 부지런하고 열심있게 행하면서 ‘전심으로’ 그를 찬미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특별한 자비에 감사하려면 우리는 이전의 긍휼을 기억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모든 기사를 전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감사의 찬미가 거룩한 기쁨의 언어인 것과 같이 거룩한 기쁨은 감사 찬미의 활력소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어떤 일이 우리를 기쁘게 하든지 우리의 기쁨은 오직 하나님 안에 귀착되어야 한다. “내가 선물 뿐만 아니라 선물을 주신 자, 곧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기쁨과 찬미는 찬송을 부름으로써 적절히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친히 교회에 대한 교만한 대적들 위에 계심을 보이셨을 때, 우리는 그 속에서 그를 ‘지극히 높으신 주’로서 영화롭게 할 기회를 갖어야 한다. 구제자, 즉 그리스도의 승리는 구제 받은 자의 승리가 되어야 한다(계 12:10; 19:5; 15:3, 4 참조).
-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는 자들이 갖는 마음의 평정과 즐거운 만족감에 대한 생각으로(10절).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나처럼(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성도들 앞에서 똑같기 때문이다)주를 의지하오리다. 그러면 그들은 내가 발견했던 것과 같이 주께서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성도에게 똑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될 수록 더욱 더 그를 의지하게 된다. 그를 무한하신 지혜의 하나님으로서 아는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욥 35:14) 이상으로 그에게 의지할 것이다. 그가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아는 자들은, 피조물에 대한 확신이 좌절되고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될 때 그에게 의지할 것이다(대하 20:12). 그리고 그를 무한하신 은총과 선하심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자들은 “그가 그들을 죽이실지라도”(욥 13:15)그를 의지할 것이다. 그를 변함 없는 진리와 성실의 하나님으로 아는 자들은 그의 약 속의 말씀을 즐거워할 것이며, 비록 그 말씀의 시행이 지연되고 중간 섭리가 그것과 상반되는 듯이 보일지라도 거기서 안식할 것이다. 그를 영들의 아버지로 그리고 영원하신 아버지로 알고 있는 자들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영혼을 그에게 맡길 것이며 항상 그리고 끝까지 그를 의지할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수록 더욱 그에게 구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성실하고 열렬한 기도로써 그에게 구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모든 이야기 속에서 그에게 우리를 보일 수 있도록 항상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시 10 – 기도와 응답>
- 다윗은 이 구절들 속에서 다음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는 하나님과 그의 은총을 매우 사모하고 있다. 왜냐하면 환난의 때에 그가 가장 절실하게 원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우신 모습을 감추시는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1절). 어찌하여 주의 이름에 행해진 모욕과 주의 백성들에게 가해진 재앙에 무관심한 자처럼, “멀리 서 계시니이까?” 하나님의 물러가심은 어느때나 그의 백성들에게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며 특히 환난의 때에는 더욱 걱정스러운 것이다. 외적인 구원이 멀어지고 우리로부터 감추어져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다고 생각하여 내적인위로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그것은 우리가 외적인 면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신앙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나서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멀리 계신다고 원망하는 것이다. 그는 죄악에 대해 커다란 분노를 하고 있다. 그 죄악은 시대를 위험하게 만드는(딤후 3:1) 것이다. 그는 불의를 목격하고 근심하고 있으며, 또한 놀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나쁜 평판을 그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져가고 있다. 그것은 헛된 영광 즉, ‘이 세리’와도 같이(눅 18:11)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 자신의 개인적인 분노나 언짢음이나 감정을 토로하기 위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과 모든 선한자 들이 모욕당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그것이 시정되기를 진심으로 바랐기 때문이었다. 감정적이고 냉소적으로 악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유익하기보다는 해롭다. 우리가 그들의 사악함을 말하고자 한다면 기도로서 그것을 하나님께 아뢰자. 왜냐하면 하나님께 서만이 그들을 더 낫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이다.
- 다윗의 기도의 대답으로 하나님은 어떻게 행하실 것인가?(18절) 하나님은 핍박 당한 자들의 송사를 변호하실 것이며, 고아들과 압제당한 자들을 판단하실 것이며 그들을 위해 심판하실 것이다. 그들의 무죄함을 밝히실 것이며 그들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실 것이고 그들이 당한 모든 손상을 보상해 주실 것이다. 또한, 핍박자들의 횡포를 종식시키실 것이다. 심판의 날까지 그들은 그렇게 행할 것이나, 그 후에는 더 이상 그렇게 행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의 악의의 기복도 멎을 것이다. 즉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치 못하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이 시편 기자가 자신이 이 시편에서 묘사하고 있는 교만한 포학자들의 힘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고 있으며, 이제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생각해 보고서 그 포학자에 대해 얼마나 경멸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보라. 첫째, 그는 ‘세상에 속한 자’(단어 그대로) 흙에서 튀어 나온 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는 천하고 연약하다. 그러므로 다시 흙이 되기를 서두른다. 그런즉 어찌하여 우리가 ‘풀같이 될 인자’(사 51:12) 에 불과한 사람을 두려워하겠는가? 우리를 보호하시는 자는 하늘의 주님이시며 우리를 핍박하는 자는 땅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슬 안에 두신다. 그리고 그의 진노를 받을 잔류자를 쉽게 제어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될 때, 사탄은 그의 도구에 의해 더 이상 비혹하지도(계 20:3), 압제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이 구절들을 노래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믿음의 영예와 유익을 위해 진심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자로서, 의로우면서도 해를 당하고 있는 믿음의 송사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합당한 때에 열심히 그것을 변호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시 11 – 유혹과 확신>
- 여기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그의 결의를 확고히 하고 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다”(1절). 진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섬기는 자들이 그를 의지하는 것은 환영받으며,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수치스럽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성도들은 그들의 희망을 하나님께 둔다. 그들 스스로를 의뢰할 만한 다른 것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것에 의지하지 않으며, 또 감히 의지하려 하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한다. 그들은 금을 바라지 않으며 말과 병거를 신뢰하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제2차적인 이유가 얼굴을 찌푸린다 하더라도 그들의 소망은 꺾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제일차적인 이유(창조주)는 여전히 마찬가지이며 항상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불신하려는 그 유혹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죽기를 각오한 자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그의 결심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유혹에 분노하고 있다. “너희가 어떻게 이처럼 영혼의 휴식과 안식처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온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새 사냥꾼의 손에 미치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도망하라 하는가?”
- 나무를 흔들면(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 나무는 뿌리를 더욱 깊고 튼튼하게 박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확신을 위축시키려는 그의 대적들의 시도는 그로 하여금 더욱 굳게 그의 처음 원리에 집착하도록 하고 그것을 재음미하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매우 만족스럽게 그렇게 하고 있으며, 불의에 대한 모든 유혹을 가라앉히고 있다. 그의 믿음을 동요시켰고 또한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동요시켜 온 것은 악인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도 형통하는 것과 가장 선한 자들이 때로 곤경과 환난에 처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행복하다고까지 부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생각들을 위축시키고 부끄럽게 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비록 그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의 대적들로 하여금 마치 성도들이 당황하고 그들의 기지가 다한 것처럼 그들을 모욕하지 않도록 하라. 그들은 하나님을 갖고 있으며, 하늘에 계시는 그들이 아버지로서의 그를 어디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에게 어떻게 기도를 올리는가를 알고 있다.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주님은 하늘에 그의 거주지 뿐만 아니라 그의 보좌를 갖고 계시다. 그리고 그는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신다”(욥 38:33). 즉 그는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신다”(103:19). 따라서 하늘을 ‘다스린다’고 일컬어지고 있다(단 4:26). 우리는 믿음으로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도록 하자. 그것은 세상의 왕들의 장엄과 위엄을 무한히 초월하는 영광의 보좌, 모든 피조물들에게 법도와 명령과 목표를 주시는 통치의 보좌, 공로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갚으시는 심판의 보좌, 그리고 그의 백성들이 긍휼과 은혜를 위해 담대히 나아올 수 있는 은혜의 보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압제자들의 교만이나 권세에 의해, 또는 의인에게 찾아오는 어떠한 환난에 의해 위축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