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vogliosessovideo.com
angel and mateo bareback.
소개
행복신앙연구소
인사말 및 환영사
추천의 글
협력 후원 단체
믿음의 선진들
우리의 믿음
진단
신앙의 점검
개혁의 핵심
예언과 경고
질문과 답변
치유
행복 마인드
신앙의 단계
마인드 신학
오해와 진실
특집
진리의 재발견
스페셜 테마
행복신앙세미나
매튜 헨리 주석 핵심
매일의 묵상
추천
장영출 목사 강해
임준식 목사 강해
기독교신문 칼럼(링크)
갓피플 칼럼
유로저널 칼럼
추천 영상
추천 사이트
교류
교회 및 단체
목회자 및 교사
기타 신자들
진리를 찾는 이들
만남
성경공부 신청
온라인 스터디
한국센터 및 상담소
개혁주의 전도자 모집
그레이스신학대학원
동행
공지 뉴스
뉴스 레터
세미나 후원
개인 후원
유로저널 칼럼
유럽 대표 시사 정론지 유로저널에 1년간 시리즈로 게재된 제임스강 목사의 칼럼 연재
22. 인간의 구성과 온전한 행복
“예일대학교의 생화학자인 헤롤드 J. 모로위츠는 인간 생명은 600만 달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헤모글로빈은 그램당 285달러 ... 프로클랙틴은 그램당 175만 달러라는 것이다.”(한국일보, 2009.11.12) 위는 인간의 구성 중 몸에 관한 가치에 대한 기사입니다. 인간은 몸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욕구들을 추구하며,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최고다’는 말처럼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주면 쉽게 만족해합니다. 하지만 몸의 만족만으로는 온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혼(魂), 곧 정신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를 모두 넘겨주는 때에도 셰익스피어 한 명만은 못 넘긴다.”(엘리자베스 여왕 1세) “작가인 롤링은 그간 인세 수입만 11억 5,000만 달러(1조 3,100억 원)를 벌었고, 2016년 기준 해리포터 시리즈는 약 250억 달러(한화 약 28조 원)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시사저널, 2017.6.26) 위의 작가들처럼 정신은 상상력이나 창의력 등을 발휘하는데, 그 가치는 몸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 정신 역시 필요로 하는 여러 욕구들이 있어, 사람들은 몸의 만족이 채워지면 음악, 독서, 오락, 게임 등을 통해 혼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몸과 혼의 욕구를 채우는 것으로도 온전한 행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란 말처럼, 인간에게는 영(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은 영적인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만 종교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 영은 영원히 존재하기에 유한한 천하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위와 같이 영은, 손의 모양을 따라 장갑이 만들진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졌기에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만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이 만족할 때 인간은 비로소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몸과 혼, 그리고 영을 위한 행복을 모두 준비해주셨습니다.
21. 사랑의 오해와 불행
“어제는 사랑이 쉬운 게임 같았어. 이제는 내가 어딘가 도망칠 곳이 필요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리메이크가 많이 된 곡이자 BBC 선정 ‘20세기 가장 위대한 명곡’으로 선정된, 세계 최고의 밴드인 비틀즈의 히트곡 <Yesterday>의 가사를 보면, 위와 같이 사랑이 결코 쉽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언어가 다르면 소통되지 않는다. 외국어를 배우듯 사랑의 언어는 배워야 한다.” 그래서인지 뉴욕타임스 130주 초장기 베스트셀러이자 4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사랑에 관한 도서들 중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5가지 사랑의 언어>에서는 위와 같이 사랑도 배워야 됨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란 대중가요 및 영화의 제목처럼, 인류가 존재해온 이래 사랑으로 인해 아픔을 겪은 이야기나 사례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사랑은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인데, 왜 사랑 때문에 불행을 겪는 걸까요? 이는 사랑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단어 중 하나가 사랑일 정도로, 실제로 사랑은 인류의 다양한 분야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히 답변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반면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사랑의 정의를 명확히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즉, 사랑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자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을 이해해야 됩니다. 사랑에 서툰 이유는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이해하면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면 사랑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사랑을 오해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오해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오해하면 결국 불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큰 행복인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을 이해해야 되며,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이해해야합니다. 즉,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과 행복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20. 가장 큰 행복, 사랑
“가장 큰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나온다.”(빅토르 위고) “가장 큰 행복이란, 사랑하고 그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앙드레 지드) 위와 같이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랑임을 명사들은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의 심리학자 라이스(Reis)와 게이블(Gable)도 수많은 연구 후,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사랑이라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명사들의 언급이나 연구 결과가 아니더라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사랑이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을 모두 시인할 것입니다. 즉, 사랑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행복을 위하는 성경 역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고 사랑을 최우선으로 두었습니다. 사랑이 인류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즉, 사랑은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음으로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기에 모두의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 역시 완전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면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래와 같이 확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어떤 해나 불행도 있을 수 없기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해하는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조차도 이 온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이유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는 구절처럼,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 사랑의 증표, 그리스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무지할 따름입니다.’ 라는 그분의 목소리가 내게서 칼을 뺏어갔소.”(영화 벤허 중) 벤허는 1959년 미국에서 개봉되어 11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 역사상 최고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외형적으로는 벤허가 주인공이지만, 복수에 불타는 그를 위의 대사처럼 변화시킨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 진짜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원작 제목도 [벤허, 그리스도의 이야기]인데, 작가 루 윌리스는 원래는 철저한 무신론자로 오류를 밝히기 위해 성경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구하면 할수록 성경이 진리인 것을 깨닫게 되어 결국 독실한 신앙인이 된 후 벤허를 집필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킨 예수 그리스도는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와 함께 세계 4대 성인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전(BC, Before Christ)과 후(AD, Anno Domini)로 역사가 나누어지듯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분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 중 하나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위한 당신의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로, ‘그리스도 안’ 이란 ‘하나님의 사랑 안’이란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난 칼럼에 언급했던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는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을 하십니다. 이 완전한 사랑 안에는 불행이 있을 수 없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 없고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행복과 감사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8. 행복의 영역, 그리스도 안
“하와이가 미국 내 50개 주(州) 가운데 가장 살기 행복한 주로 선정됐다.”(2010년 02월 18일 뉴시스) “하와이 주민들은 ‘하루하루가 공포’ ‘어제보다 더 무서운 오늘’ 등의 입장을 트위터나 언론 등에 표출하고 있다.”(2018년 5월 21일 내외경제TV) ‘지상 최고의 낙원’으로 불리던 하와이가 지난 해에는 화산 폭발로 인해 공포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인류에게 완벽한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는 장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 칼럼에 언급한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는 구절을 통해, 인류에게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영역이 준비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 안’입니다. 식물에게는 생장점이란 것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이 생장점 안에는 바이러스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바이러스보다 더 빠른 세포의 움직임이 쉼 없이 일어나 바이러스가 발붙일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는 불행이 발붙일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은 불행이 존재할 수 없는 완벽한 행복의 영역으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가장 중요하기에 성경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온 세상에 홍수가 임하여 멸망을 당할 때 노아와 가족들을 보호했던 구원의 방주, 애굽의 모든 장자의 죽음 앞에서 안전했던 집에 발려졌던 유월절 어린 양의 피, 심판의 나팔 소리에 의해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유일하게 보존되었던 라합의 집에 걸렸던 붉은 줄 등등. 이처럼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성경은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한 완벽한 행복의 영역임을 끊임없이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완전한 행복을 누리길 원하시는데, 이 ‘그리스도 안’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7. 완벽한 행복, 범사의 감사
“내 인생에서 행복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1999년 갤럽의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된 헬렌 켈러는 눈을 감기 전 위와 같이 말했습니다. 생후 19개월 만에 열병으로 인해 시각과 청각, 그리고 언어를 잃어 평생 장애자로 살았던 헬렌 켈러는 어떻게 ‘항상 행복할 수 있는 완벽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을까요?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이다."(빌헬름 웰러) “감사의 분량이 행복의 분량이다.”(타고르)는 말처럼, 완벽한 감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감사는 완벽한 행복을 가져다주는데, 완벽한 감사는 다음과 같은 감사입니다.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헬렌 켈러) 여기서 주목해야 될 부분은, 헬렌 켈러의 감사는 좋은 조건으로 인한 감사가 아니라, 역경으로 인한 감사라는 것입니다. 좋은 조건 안에서는 누구나 쉽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온전한 감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쁜 조건이 오면 감사가 나오지 않고 행복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온전한 행복을 위한 성경은 감사에 대해 이렇게 조언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범사에 감사’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범사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일이기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완벽한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이 ‘범사에 감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면서도 ‘범사에 감사’하는 길로 나아오지 않고 있거나, ‘범사에 감사’하는 길로 나아왔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16. 행복의 기둥, 감사
“많은 사람이 저에게 팔 다리가 없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느냐고 물어봐요. 우리는 매일 매일 선택할 수 있어요. 가질 수 없는 것에 화를 낼 것인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해할 것인지” 위는 2013년 힐링캠프에 출연한 닉 부이치치의 강연 내용입니다. 닉 부이치치는 1982년 호주에서 팔 다리가 없는 기형으로 출생하여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15살에 신앙을 가지면서 마음이 변화되어 현재는 ‘희망의 아이콘’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세계적인 강사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팔 다리가 없는 조건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이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몰핀은 진통제로 널리 사용되는데, 엔돌핀은 몰핀보다 100배의 효과가 있어 ‘암 치료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이돌핀은 엔돌핀보다 무려 4,000배나 더 효과 있는 ‘행복 호르몬’으로, 감동을 받거나 감사가 가득 찰 때 발생한다고 합니다. 즉, 감사는 행복을 지탱해주는 기둥으로, 감사가 있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행복은 감사하는 자의 몫"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롬 1:21)라는 구절처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알았지만 감사가 없었습니다. 팔 다리가 없어도 감사가 있으면 행복할 수 있지만, 낙원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류의 첫 범죄는 감사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는 기독교 철학자 프란시스 쉐퍼의 분석처럼, 결국 감사 없는 마음을 가진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롬 1:21)라는 구절 속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감사는 영어로 ‘Thank’ 이고, 생각은 ‘Think' 인데, 두 단어의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즉, 감사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어, 생각을 하면 감사할 수 있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감사를 불러오는 것일까요?
15. 행복으로 이끄는 은혜의 눈
“서로 다른 피부색을 지녔다 해도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죠. 바람이 보여주는 빛을 볼 수 있는 바로 그런 눈이 필요한 거죠. 아름다운 빛의 세상을 함께 본다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어요” 위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 ‘포카혼타스’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인 포카혼타스가 영국인 존 스미스와 사랑을 나누며 부른 ‘바람의 빛깔’이란 OST의 마지막 가사입니다. 서로 다른 부분이 있어도 같은 시각을 가진 눈으로 함께 보게 된다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 언급했듯이 인류를 하나님과 분리시킴으로 불행 속으로 이끌고자 했던 루시퍼는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실과를 먹자마자 눈이 밝아졌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창 3:8) 숨으며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과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구절처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보시면서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눈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래 전 온 세상에 임한 심판의 대홍수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사람은 노아였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12:1)는 구절은, 영어 성경에서는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the LORD.”로, “노아는 하나님의 눈 안에 있는 은혜를 발견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눈은 은혜를 품은 눈인데, 노아가 그 눈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인간을 보십니다. 은혜란 값없이 복을 주시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대하신다는 것은 조건 없이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의 눈 앞에서는 누구나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고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탕자였던 둘째 아들이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은혜의 눈 때문입니다. 하지만 맏아들처럼, 다른 눈을 가지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14. 행복으로부터의 분리
“우리의 소원은 통일 ~ 이 나라 살리는 통일 ~ 통일이여 어서 오라 ~” 지난 4월 1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평화 협력기원 공연에서 마지막에 함께 부른 노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었습니다. 이어서 열린 합동 공연의 주제는 ‘우리는 하나’ 이었습니다. 통일은 말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으로 분단 후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까지 겪은 남북한의 평화는 하나가 될 때 정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일로 하나됨으로 화목과 평화가 정착되는 것'은 인류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변함없는 진리로, 하나가 될 때 모든 전쟁과 불행이 사라집니다. 반면에 분열에서 모든 불행이 시작되는데, 분열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계 12:7,8) 성경은 최초의 전쟁에 대해 위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지난 시간 언급했던 불행의 경계거리, 곧 루시퍼가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여 온 우주에서 최초로 분열을 일으킴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엡 4:6) 하나님은 만유, 곧 모든 것을 통일하심으로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시는데, 루시퍼는 이를 대적하여 인류를 하나님과 분리시킴으로 불행 속으로 빠트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위는 인류를 하나님과 분리시키고자 하는 루시퍼의 간교한 속임수로, ‘하나님이 너희를 정말 위하시는 줄 아느냐?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아. 그건 거짓말이야!’라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심어준 것입니다. 그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고, 결국 인류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불행 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불행의 근원에 공통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불신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13. 행복을 가로막는 불행의 시작
“원장님, 제 몸이 이상이 있는 것 같으니 좀 봐주세요.” “그래요. 그럼 먼저 이상 있는 곳을 하나씩 찾아봅시다.” 한 남자가 한의원을 찾아가 건강 진단을 요청했습니다. 원장인 한의사는 먼저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 눌러보라고 했습니다. 한의사의 지시대로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 누른 그는, 바로 아프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한의사는 즉시 그의 머리를 검진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이상이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한의사가 이번에는 배를 눌러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아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배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한의사는 어깨를 눌러보라고 했습니다. 역시 남자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어깨를 살피던 한의사는 남자에게 손가락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손가락이었습니다. 손가락이 병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느 유머집에서 읽었는데, 인간의 불행의 시작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 남자에게 이상 있는 부위가 손가락뿐이었던 것처럼, 인간의 불행은 한 가지 요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불후의 명작으로 유명한 밀턴의 ‘실낙원’은 인간이 어떻게 낙원 곧 행복의 터전을 잃어버렸는지를 잘 묘사해주고 있는데, 이는 성경에 기초한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한 삶의 터전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 후 인간을 창조하셔서 그곳에 두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에덴이란 이름의 동산으로 ‘낙원’ 곧 영어로는 ‘파라다이스(paradise)’인데, 국어사전은 ‘걱정이나 근심 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인류의 행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 걱정이나 근심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낙원을 인간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곳에서 인간이 행복을 누리고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하게도 여전히 낙원에 머물러 있음에도 첫 사람 아담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라며 불행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신 두려움, 어디에서 이 불행이 찾아왔을까요?
1
2
3
»
마지막
모두
제목
내용
검색
Powered by KBoard
| 추천 |
장영출 목사 강해
임준식 목사 강해
갓피플 칼럼
유로저널 칼럼
추천 영상
추천 사이트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