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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완전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복
“우주의 모든 것은 자연의 기본적인 힘에 의해 정해집니다. 그 힘의 세기는 기본 상수라고 불리는 숫자로써 표현됩니다. 상수는 너무나도 센시티브해서 아주 조금이라도 바뀌면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이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서 얼마나 정확해야 했는지를 나타냅니다.”(Laura Danly, 그리피스 천문대 소장, 천문학자) “자연의 상수와 법칙 등 우리가 아는 모든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존재하게 하려고 조정되었다는 생각을 가져야할 것 같습니다.”(Leonard Susskind, 스탠포드대 물리학 교수, 끈 이론의 선구자) 현대 우주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천문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우연으로 존재하기에는 불가능한 확률로 아주 미세하게 조정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우주의 미세 조정’으로 부르는데, 우주는 전 세계 바닷가의 모든 모래들 중 단 하나만 더하거나 빼는 경우의 수 이상의 확률로 그 존재 여부가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행 17:24,25)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사 45:18) 이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가 거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온 우주를 세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는 말씀처럼 인간은 실수가 많기에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신 절대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실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도는 완전”(시 18:30)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福) 역시 완전합니다.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추어져 모자람이나 흠이 없음’ 이란 ‘완전(完全)’의 사전적 의미처럼, 하나님의 복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특히, 아래의 말씀들에서 소개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창 24:1)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 39:23)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부분은, 하나님은 ‘범사’ 곧 ‘모든 일’에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특정한 일에 있어서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보기에 어떠하든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완전한 복을 얻게 되면 온전히 즐거워할 수 있고,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신 16:15) “항상 기뻐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많은 이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일이 잘 되거나 바라는 어떤 것들을 얻게 될 때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셨다고 기뻐하며 감사해하는데, 어떤 조건을 따라 부분적으로 기뻐하고 감사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복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된 복을 얻게 되면 반드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온전히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설령 모든 것이 늘 즐겁게 해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늘 유익을 준다.”(찰스 스펄전) 스펄전의 위의 언급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일은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복이 틀림이 없지만 늘 즐겁지는 못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범사가 하나님의 복이라면 당연히 범사에 감사해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왜 그렇지 못한 것일까요? 이는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위한 하나님의 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위와 같이 성경은 인간을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성경에서는 몸과 영혼으로만도 구분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삼분설이니 이분설이니 하면서 한쪽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은 둘 다 표현하고 있기에 모두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된다고 봅니다. 스펄전은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지하는 중생론은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는 사람은 오직 육과 혼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나, 그가 거듭나게 되면 새롭고도 고상한 본성 곧 '영'이 창조된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세 부분 곧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된 존재가 되고, 영이 세 부분 가운데 지배적 능력이 됩니다."(찰스 스펄전, The Soul Winner p.22) "작가들은 인간을 몸과 정신을 가진 두 부분으로만 표현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인간들을 표현하는 데에는 그러한 표현이 맞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을 '몸(body)과 혼(soul), 그리고 영(spirit)'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몸은 혼의 지배를 받고, 혼은 영의 지배를 받습니다."(찰스 스펄전, 1858년 6월 20일 주일설교) 삼분설과 이분설은 표현의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자동차 회사에서 신차를 설명할 때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때에는 외부와 내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지만 세밀하게 설명할 때에는 내부 안에서도 엔진파트와 구동파트 등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둘 다 내부에 있지만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외부의 물질 세계와 접촉되는 외적 부분과 내부의 정신 세계와 접촉되는 부분으로 크게 나눌 때에는 몸과 영혼으로 표현하는 것이 맞지만, 내부의 정신 세계를 자세히 설명할 때에는 단순한 정신 세계를 가진 혼과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를 갖는 영은 구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의해야 될 점은, 몸과 혼과 영 이 세 가지가 서로 다르기에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복들도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중 어떤 것은 몸에는 유익하지만 혼과 영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고, 또 어떤 축복은 영과 혼에는 유익을 주지만 몸에는 유익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을 이해하려면 인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인인 몸과 혼과 영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몸에게는 몸에게 맞는 복을, 혼에게는 혼에게 맞는 복을, 영에게는 영에게 맞는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범사를 만날 때 하나님이 어떤 부분에 축복을 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일인지를 헤아려야 됩니다. “예일대학교의 생화학자인 헤롤드 J. 모로위츠는 인간 생명은 600만 달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헤모글로빈은 그램당 285달러 ... 프로클랙틴은 그램당 175만 달러라는 것이다.”(한국일보, 2009.11.12) 위는 인간의 구성 중 몸에 관한 가치에 대한 기사입니다. 인간은 몸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욕구들을 추구하며,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최고다’는 말처럼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주면 쉽게 만족해합니다. 하지만 몸의 만족만으로는 온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혼(魂), 곧 정신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를 모두 넘겨주는 때에도 셰익스피어 한 명만은 못 넘긴다.”(엘리자베스 여왕 1세) “작가인 롤링은 그간 인세 수입만 11억 5,000만 달러(1조 3,100억 원)를 벌었고, 2016년 기준 해리포터 시리즈는 약 250억 달러(한화 약 28조 원)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시사저널, 2017.6.26) 위의 작가들처럼 정신은 상상력이나 창의력 등을 발휘하는데, 그 가치는 몸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 정신 역시 필요로 하는 여러 욕구들이 있어, 사람들은 몸의 만족이 채워지면 음악, 독서, 오락, 게임 등을 통해 혼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몸과 혼의 욕구를 채우는 것으로도 온전한 행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란 말처럼, 인간에게는 영(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은 영적인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만 종교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 영은 영원히 존재하기에 유한한 천하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영으로, 영을 위한 축복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위와 같이 영은, 손의 모양을 따라 장갑이 만들진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졌기에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만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이 만족할 때 인간은 비로소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몸과 혼, 그리고 영을 위한 행복을 모두 준비해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8,9) 많은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의문 중에 하나가 에덴 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의문은 하나님의 본심을 모를 때 가지게 되고 거기서 오해가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창 24:1)는 말씀처럼, 모든 것에 복을 주시는 것이기에 선악과 역시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런데 몸과 혼, 그리고 영으로 구성된 인간의 무엇을 위한 복이냐는 것입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16,17)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낙원인 에덴 동산에 먹을 수 있는 실과와 먹지 말아야 되는 실과를 허락해주셨습니다. 물론, 먹을 수 있는 실과는 몸과 혼을 위한 복이었습니다. 배부름이란 몸의 만족과 성취감이란 혼의 만족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먹을 수 없는 실과는 몸과 혼을 위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데, 왜 먹을 수 없는 선악과를 동산, 그것도 중앙에 두신 것일까요? 그것은 몸과 혼이 아닌, 영을 위한 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합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복을 기억하고 감사해할 때입니다. 그래서 “내 복으로 내 백성에게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14)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4)는 말씀처럼, 인간은 교만해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무시하게 됩니다. 교만은 어떤 것을 얻게 되면 자신의 힘으로 되어졌다는 착각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 8:17,18) 그래서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선악과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즉, 먹을 수 없는 선악과가 동산 중앙에 있으면, 먹고 싶은 실과를 마음껏 따먹다가도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 때문임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몸과 혼, 그리고 영을 위한 완전한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3.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전 7:14_개역한글) 위는 진리를 전한다는 의미의 전도서에 나오는 말씀인데,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부분입니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슬퍼하라’가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시험에 합격하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일이 잘 되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는 반면 시험에 떨어지거나 돈을 많이 잃거나 일이 잘 안 되는 곤고한 날에는 슬퍼하거나 고통하며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곤고한 날에 고통해하지 말고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곤고한 날에 생각하라고 하실까요? 이는 곤고한 날이 불행한 날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교회에 열심히 나간 분이었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회에 나가며 신앙에 열심을 내서 자타가 공인하는 신앙심이 뜨거운 독실한 신자였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을 만나게 되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교회를 나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궁금해진 저는 재차 질문했고, 결국 그분은 한숨을 쉬면서 아래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사실은... 제 아들이 올 해 재수하여 대학 시험을 보게 되어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이번에는 꼭 합격시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 이번에도 떨어졌어요. 그렇게 새벽마다 매달리며 도와달래도 도와주지 않는 하나님을 제가 왜 믿어야 되나요?” 이런 사례는 흔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행복과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행복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일락(pleasure)을 추구합니다. 일락이란 자기 향락으로 자기가 원하는 어떤 조건 하에서 누리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기쁨은 ‘항상 기쁨’입니다. 즉, 언제 어디서나 어떤 조건이나 환경이든지 기뻐할 수 있는 기쁨으로 온전한 기쁨과 행복입니다. 이 온전한 행복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분명히 다름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세상이 주는 것은 어떤 조건에 따라 기뻐하는 일락입니다. 이 기쁨은 온전한 기쁨이 아닙니다. 왜냐면 그 기쁨을 주는 조건과 환경이 아니면 오히려 슬픔과 불행을 안겨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일락을 좋아하길 원치 아니하십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_개역한글) 위와 같이 살았으나 죽었다는 표현처럼, 일락은 행복인 것 같지만 사실은 불행입니다. 마치 취하면 황홀해하다가도 떨어지면 고통하는 마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더큰 문제는 마약에 취하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듯 일락에 취하면 참되고 온전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참 행복이 아닌 일락의 정체를 깨닫고 당신 앞에 나아와 항상 기뻐하는 온전한 행복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일락의 정체는, 곤고한 날 곧 일락을 누리지 못하는 날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곤고한 날에 불행해하지 말고 생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본심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불행을 허락하시는가?'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가난 속에서 고생하거나 어려움을 만나 고통해하며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면 쉽게 위와 같은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불신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를 퍼붓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지 못해서 오는 결과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렘애 3:33) 하나님은 위와 같이 당신의 본심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고생하고 근심하며 사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하십니다. 그렇기에 불행한 이유는 하나님의 본심과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본심과 같은 마음을 가지면 행복할 수 있고,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 다른 마음을 가지면 불행을 느끼게 됩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렘 2:19)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악과 패역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화를 하나 든다면, 오래 전 죽마고우처럼 지내던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서로를 아끼며 굉장히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성장하여 둘 다 결혼하였고 과거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한 친구는 합격하였고 다른 친구는 떨어졌습니다. 급제한 친구는 고향의 사또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떨어진 친구가 사또가 된 친구를 의지하며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사또 친구에게 찾아가 도움을 받았기에 별 어려움이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점점 공부에 게을러졌습니다. 나중에는 어려운 과거 시험 공부를 해야 할 필요조차 못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친구는 더욱 빈둥거리다가 나중에는 고을의 골칫덩이가 되었습니다. 고을 사또가 자기 친구라는 이유로 고을에서 큰 소리를 치면서 난봉을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그날도 장날에 사람들과 싸우다가 관청에 끌려갔는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습니다. 사또 친구가 그 친구를 엄하게 벌을 주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얼마 후 옥에서 나와 아픈 몸을 이끌고 겨우 집에 갔더니 자기가 없는 사이에 집에 큰 불이 나서 온 가족이 생사도 모르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큰 슬픔에 젖어 울던 그 친구는 이를 갈면서 눈썹을 밀고 산 속으로 들어가 과거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결국 수 년 후 장원급제한 친구는 암행어사가 되어 고향으로 내려갔고 내려가자마자 사또 친구에게 보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사조차 몰랐던 가족들이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친구를 정말 사랑했던 사또 친구가 모두 계획한 것이었습니다. 본심은 정말 친구가 행복하기를 바랐는데 그냥 내버려두면 결국 친구와 온 가족이 망할 것이기에 일부러 냉정하게 대하며 고난을 겪게 한 것이었습니다. 실제 본심과는 전혀 다르게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진심으로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지만,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없이 자기를 불행하게 만드는 악한 마음을 따라 불행의 길로 갈 때에는 때때로 고난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물론, 고난을 통해 우리가 고통 받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결국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위의 말씀처럼, 장래에 소망과 행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 마땅한 행복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 성경을 하나의 스토리로 요약하면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돌아온 아들을 받아주시는 아버지를 통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한 부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한 후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하게 살게 됩니다. 그 후 돼지 먹는 쥐엄 열매도 먹지 못한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과 아버지 안에서 풍족하게 살아가는 품군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하며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풉니다. 하지만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맏아들은 그 사실을 알고는 매우 화를 냅니다. 아버지의 명을 잘 따랐던 자기에게는 별로 복을 주지 않더니 죄만 짓다 돌아온 동생에게는 큰 복을 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한 사람들은 모두가 기뻐했지만 맏아들만 기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맏아들이 화를 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어떤 조건이 아니라 무엇을 마땅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에 대해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행복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에드 디너는 “행복은 삶에 대한 마음의 태도이다.”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즉, 행복은 마음의 상태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나 믿음처럼 행복은 육체가 아닌, 마음에 관련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 속에 있는 것은 불행을 마땅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십니다. 그렇기에 행복과 불행은 하나님의 마음과 함께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비록 몸은 아버지와 함께하고 있지만 마음은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아버지를 잘 따르고 섬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버지와 다른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했던 예수님은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 8: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하느냐 하지 않느냐, 참 신앙을 갖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항상 기뻐하는 온전한 행복 속에서 살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도 “하나님은 복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온전한 기쁨 속에 사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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