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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기 판단, 불신의 독성
한번은 영국 비자에 대해 도움을 구하는 학생들에게 조언을 해준 적이 있는데, 다른 학생들은 모두 비자를 받았지만 한 학생만 못 받았습니다. 사유를 알아보니 비자법대로 신청하지 않고 자기 판단대로 신청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영국 비자법을 정확히 알려줬는데도 불구하고 그 학생은 자기 판단대로 했다가 결국 떨어져 괴로워했습니다. 세상에는 판단해야 될 일들이 많고, 사람들은 많은 판단을 내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판단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판단이든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른 판단은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만, 잘못된 판단은 나쁜 결과를 초래합니다. 창세기에는 우주만물과 인류, 그리고 죄와 불행의 근원 등에 대해 나옵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이란 낙원을 허락해주셨는데, 어느 날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의 벌거벗은 연약한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을 봅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연약했지만,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한 때부터 연약함은 불행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그들의 모습이 아닌, 그들의 마음의 위치를 문제 삼으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거짓된 자기 판단에 머물러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이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하나님의 판단 안에 있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결국 그들의 첫 판단이 첫 불행을 만들고,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금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다른 자기 판단이 인간에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판단은 선악과로 인한 불신의 독성인 것입니다. 그 독성이 인류에게 퍼졌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회와 신앙에 대해 나름대로 각자의 판단을 따라 사는 것을 봅니다. 문제는 그 판단이 참된 판단인지를 확인하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자기 판단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게 만들고 결국은 멸망으로 몰고 갑니다. 특히, 신앙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에서 자기 보기에 신앙생활 잘 했지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은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고 선지자 노릇하는 등 자기들의 신앙이 괜찮다는 판단으로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자기 판단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무시하는 큰 악인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불완전한 인간의 판단이 아닌, 완전하신 하나님의 판단만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고 했고, 요셉도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창 40:8)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해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래 말씀처럼, 주께서 오시기 전 곧 하나님의 판단과 해석을 갖기 전까지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는데에서부터 신앙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전 4:5)
3. 소원의 법칙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주 만물에 수많은 법칙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과학자들은 그 법칙들을 발견할 뿐입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세계의 법칙을 알면 신앙이 쉬운데, 사단은 그 법칙을 정확히 알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혼미케 합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영적 법칙들 중 기본이 되는 소원의 법칙을 살펴보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무언가를 원하고 바라는데, 그러한 바람들을 ‘소원’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많은 소원을 가지고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나 소원이 이루어졌는가?’ 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수많은 소원들이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소원에 대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법칙을 잘 몰라서 입니다. 히브리서는 그 소원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 11:1) 이 말씀에는 세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믿음’, ‘바라는 것’ 곧 ‘소원’, 그리고 ‘실상’입니다. 사람들은 소원이 실상이 되길 원합니다. 하지만 소원의 법칙에 의하면 믿음이 소원을 실상으로 만들어줍니다. 즉, 믿음이 없으면 소원이 실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소원 중에 믿음이 없어도 이루어진 것 같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살펴보면 실상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믿음으로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소원의 법칙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하나님과 마음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우리의 행복을 원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된 책인데, 전체 66권 중 가장 중앙에 위치하고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 책은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행 13:22)는 이야기를 들은 다윗이 주로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는 다른 어떤 책보다 하나님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복 있는 사람은”(시 1:1) 하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 되길 진심으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만일 세상에서 ‘돈 있는 사람’, ‘인기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 등을 대라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 있는 사람’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복 있는 사람은 찾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려는 소원을 품고 평생을 살아가는데, 왜 복 있는 사람은 드물까요? 이는 믿음 곧 자신이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위해 오신 예수님도 8가지 복(福)을 통해 첫 설교를 시작하셨는데, 한결같이 하나님과 마음이 같아지는 부분에 대한 말씀이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복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과 같은 마음 곧 믿음을 얻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모른 채 자기 소원만 가지고 사는 것은 무익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신앙 생활을 하고 계신 분이 많을 것인데, 여러분들은 얼마나 기도 응답을 받고 사십니까? 응답률이 50% 정도 됩니까? 두 번 기도해서 한 번 응답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이 잘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분명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100% 들어주십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그렇게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도가 두 종류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본성적인 기도와 자기 판단의 기도입니다. 본성적인 기도란, 행복하게 되길 원하는 본성에서 나오는 무의식적인 기도입니다.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행복을 추구하는 소원이지요. 반면에 자기 판단의 기도는 의식적인 기도로 각자가 다릅니다. ‘~ 을 얻으면 좋겠다. 행복해지겠다.’는 자기 판단 아래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판단이 틀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기도는 오히려 자기를 불행하게 해줍니다. 기도가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입맛에는 맞아도 몸에는 해로운 음식들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판단에 의해 구하는 기도 중에 잘못된 기도가 많다는 것을 아십니다. 즉, 자기 판단의 기도와 본성의 기도가 다를 때 하나님은 본성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때 자기 판단의 기도에 초점이 맞춰진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기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찾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믿음을 얻는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그만큼 잘못된 자기 판단으로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기도 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신은 옳고 하나님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실수나 잘못을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오하신 분이시기에 결코 그러한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잘 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에는 자신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먼저 돌아봐야 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같은 마음인 믿음을 얻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정하신 소원의 법칙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 11:1)라는 말씀을 따라 행복이 실상으로 오는 것입니다.
2. 없는 하나님
“아마도 신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걱정은 그만하고 인생을 즐기세요.(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혹시 2009년 런던에서 시작된 위 사진의 캠페인을 아시는지요? 영국의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은 없으니 걱정을 그만하고 인생을 즐기라'는 문구를 800여대의 버스에 새겨서 광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구 중 ‘아마도’라는 단어는 삭제해야만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아마도’ 없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걱정과 괴로움을 주는 분이기에 존재하지 않아야 본인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런 괴물(?) 같은 하나님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오해 속에 있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 하나님과 다른 자기 생각 속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 역시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행 7:25)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행 7:32)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친히 가르쳐주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한 하나님은, 그들을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후 친히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인간의 손이 아닌 하나님 당신의 손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피곤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앞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함께하면 반드시 인간의 수고와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참된 평안을 얻게 됩니다. “항상 기뻐하라 ...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여러분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복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참 신앙의 캠페인 모토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계십니다. 이제 하나님과 함께하여 기쁨으로 인생을 복되게 사세요.”
1. 인생의 목적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2천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세계이자 시공의 제약을 받는 불완전한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세계이자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는 완전한 세계에 속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고 가장 먼저 회개와 함께 우리가 사는 세계가 아닌 천국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천국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그곳은 영원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이 우려하듯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언젠가 사라질 것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계 21:1) 미래를 예언한 사도 요한의 위의 말처럼, 처음 하늘과 땅인 이 세계가 없어지면서 영원한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두 세계에서 살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즉,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육체도 가지고 창조되었고, 영원한 세계에 살 수 있는 영혼도 가지고 창조된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에 처소가 많다고 하시며 제자들을 위해 예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야 될 참된 처소는 이 세계에 있지 않고 영원한 세계에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실 영원히 존재하는 우리 영혼이 살아야 될 처소는 유한한 이 세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왜 영원한 처소에서 바로 살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아이가 잉태되어 엄마 뱃속에서 10개월 정도를 사는 것은 세상에 나와 살 준비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창조되자마자 바로 천국에 가서 살지 않고 이 세상을 거치도록 하신 것은 영원한 세계에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아담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를 보면 외형적으로는 성장한 인간이었지만 모르는 것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씩 가르쳐주셔야 되었는데, 문제는 지식만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가령 1+1=2 는 지식으로 알 수 있지만, 사과의 맛이나 꽃의 향기는 경험으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에서 아버지 없이는 두 아들 모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말로 설명한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인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가서 살면서 철저히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를 경험으로 깨우쳐 알게 되면서 아버지의 능력도 동시에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이 많으시고 얼마나 사랑이 풍성하시며 얼마나 완벽한 분이신지 알고자 하지만, 자신을 몰라 아버지도 알지 못한 맏아들의 위치에서는 하나님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을 알아야 하나님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기독교강요 1권 1장)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탕자에게 먼 나라를 허락함으로 탕자가 자신의 모습을 배우게 되고 아버지에게 돌아와 행복하게 살게 된 것처럼, 하나님은 잠시 머무르는 유한한 이 세계에서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 정확히 깨우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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