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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와 진실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말씀을 정확히 모를 때 오해될 수밖에 없는 진실에 대한 해명
4. 말라기의 경고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말 1:1) 말라기는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구약과 신약의 징검다리 역할을 합니다. 즉, 말라기를 통과해야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라기를 시작하시면서 위와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경고란 꼭 알아야되는 내용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은 무엇일까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말 1:2)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약속의 책으로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집니다. 이 두 약속은 두 길, 두 법, 두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은 율법이 이 땅에 내려온 후 기록되기 시작했는데, 아래와 같이 인간의 행위를 요구하는 법으로 인간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신 28:2) 다시 말해 구약 시대는 인간의 행위가 중심이 되는 시대로 인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율법에 속한 시대인 것입니다. 반면에 신약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래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즉, 신약 시대는 하나님의 은혜가 중심이 되는 시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론적으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아래 구절에서 밝히듯 율법과 은혜인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율법과 은혜를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신앙은 구약 시대의 율법에 속한 것이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신앙은 신약 시대의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구약 시대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이 수고하고 애를 쓰는 삶을 살지만, 신약 시대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은 쉬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모든 일을 하시고 인간은 그분의 은혜를 입는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위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신약 시대 곧 안식의 세계로 이끌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약 시대에 머물러 자신이 수고하고 애쓰는 삶을 살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말 1:2) 이는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 하신 위의 경고를 통과하지 못해서입니다. 즉, 사랑의 문제로,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지만, 그들은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파생됩니다. 인류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랑과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은 수고와 죄악, 고통과 근심 등 온갖 불행에 지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인류에게 불행이 온 것이기에 인류의 모든 불행의 해결책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증뿐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는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 앞에서 "예. 정말 당신은 나를 온전히 사랑하십니다."라고 마음으로 화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지만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아직까지 자기 수고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약의 사람인 것입니다.
3. 두 부류의 열심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갈 4:17) 성경에는 ‘열심’이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열심이고, 다른 하나는 피조물인 인간의 열심입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에 대해 가장 많이 혼동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열심과 인간의 열심에 대한 구분입니다. 열심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것’ 입니다. 즉, 열심은 어떤 일을 이루고자 온 정성과 마음을 쏟는 것인데 문제는 열심을 가진 당사자의 능력입니다. 사실 열심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누구의 열심인가?’ 입니다. 한 인터넷 신문의 정치 논평 기사에서 “무서운 것은 무능한 사람이 열심 내는 것이다. 무능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낫다.”는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는 무능하면서 열심을 내면 오히려 일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실 때 홀로 창조하셨습니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 44:24) 하나님은 왜 홀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을까요? 모두가 알듯이 우주는 그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대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광대한 우주가 지구에 생명체를 보존시키는데 있어서는 지극히 세미하게 조정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광대한 영역에 관해 정밀과학이 가르쳐준 모든 사실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과는 전혀 무관하게 독립적인 어떤 확실한 질서가 압도하고 있다. 드러난 증거로 보아 인간과 자연은 우주의 지성적 질서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막스 플랑크, 현대 물리학의 창시자) 뉴턴 이후 물리학 최대 발견인 ‘양자역학’을 입증하며, 아인슈타인과 함께 현대 물리학을 선도한 막스 플랑크의 고백처럼 우주에는 지성적 질서가 있는데, 최근에는 그 질서가 너무나 놀랍도록 미세하게 조정되어 조금만 달라져도 우주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즉, 지구와 태양의 크기, 지구와 태양의 거리, 지구와 달의 중력, 지구 대기층의 유무, 지구의 공기와 물의 유무 등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생명의 조건들 외에도 양성자의 질량, 전기력의 힘 등 아주 세미한 조건들까지 모두 생명체를 위해 미세하게 조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이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생존에 초점을 맞추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광대한 우주를 정밀하게 창조하는 일을 할 만한 존재는 당신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홀로 창조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피조물의 어떤 도움 없이도 온 우주 만물을 완벽히 창조하셨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 2:1)는 말씀처럼, 우주 만물은 어떤 실수도 없이 완벽히 만들어졌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계 4:11) 그런데 하나님의 온전하신 능력을 부정하고 영광을 가로채고자 하는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다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온 우주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인 루시퍼 역시 창조 되었을 때는 아래와 같이 완전한 존재였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겔 28:12) 문제는 루시퍼가 교만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존재가 된 것이지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데도, 자신도 하나님처럼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다는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했다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체 하였으니”(겔 28:5,6)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5) 그 마음이 거짓의 시초이자 최초의 불의로 모든 악과 불행의 근원입니다. 만일 루시퍼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자신의 온전함을 믿고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면, 그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교만은 불의를 낳았고, 그 불의가 자기 열심을 만들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2~14) 위와 같이 루시퍼는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진리를 무시한 채 자기 열심을 따라 스스로 뭔가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 열심은 자기를 세우고자 하는 악한 열심으로, 하나님을 대적할뿐더러 결국 자신도 망하게 만드는 불행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 14:15)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겔 28:16) 그런데 안타깝게도 루시퍼의 교만이 그의 불행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도 루시퍼의 교만이 심겨졌고, 루시퍼와 동일하게 하나님에 의해서만 행복할 수 있다는 진리를 외면한 채 자기 열심을 따라 스스로 자기를 위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경계거리가 되고”(겔 28:19) 하나님은 루시퍼를 쫓아내시며 루시퍼를 아는 사람은 루시퍼를 경계거리로 삼을 것이라고 하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루시퍼에 대해 몰랐기에 경계하지 못한 체 속은 것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후손인 인류 역시 루시퍼의 교만에 사로잡혀 불행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즉,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열심과 은혜 안에서 쉬는 행복한 삶을 얻기 전까지는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며 자기 스스로 열심을 내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열심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에게도 스며든 것입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 22:3)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빌 3:6) 사도 바울은 위와 같이 과거에 자신이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열심을 냈던 사람이었지만, 그 열심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음을 고백했습니다. 당시에는 자기 열심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1~3)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 참 신앙을 얻은 후 전에는 믿음으로 보았던 인간의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열심과 의를 대적하며 결국 멸망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위와 같이 구원 받지 못한 유대인들이 자기 열심의 거짓된 믿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열심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해줍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고후 11:2) 하나님의 열심으로 열심 낸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는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왕하 19:31)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열심과 일하심에 초점을 맞춘 믿음의 열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대한 이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자기 열심으로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했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열심으로 구하려다가 실패했던 40세의 모세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해결된 것을 보면서 위와 같이 말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쉼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 보는 마음으로 문제를 대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후 15:15) 그리고 결국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친히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로서 예수님을 통해 얻을 수 있음을 설교석상에서 아래와 같이 자주 강조했습니다. “모든 것들은 열심이 선두에 서서 이끌어야 합니다. 이 열심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 활력이 성령의 지속적인 역사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열심을 외투처럼 입고 계셨습니다. 그분을 태우고 달려갔던 사명이라는 마차의 바퀴는 얼마나 빨랐는지요! 그 열심을 얻기를 바랍니다.”(찰스 스펄전, 1857년 11월 22일 집회설교 중) “하나님의 열심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 열심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길로 가게 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우리의 겨울은 끝나고 태양이 비치며, 우리 마음은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납니다.”(찰스 스펄전 설교집 중, 1914. 11. 12 출판) 마지막 때 교회 모습이라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런 열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열심이 없으면 차가운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열심을 사모해야 되는데, 미지근한 상태에 만족하며 머물러 있었기에 참된 신앙을 얻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래와 같이 강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16~20)
2. 쉬운 신앙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하면, 대부분이 '신앙생활은 어렵고 힘든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는 큰 오해로, 신앙은 쉽고 평안해야 정상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위의 말씀처럼 당신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평안히 쉬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고 당신의 멍에는 쉽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어렵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평범한 사람은 감각에 지배를 받는다. 시력, 후각, 청력, 촉각 및 미각을 통해 받는 자극에 반응한다. 즉,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 간다. 관찰할 수 있는 증거에 기초할 때 확실하다고 믿는다. '보는 것은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삶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신뢰하고, 감각적으로 만지고 볼 수 없는 것에 의지하고 믿어야 할 때가 많다." 최근 영국의 유명 기독교 잡지인 크리스천 투데이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위와 같이 밝혔습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을 따라 믿고 살아가는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 믿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감각으로 형성된 우리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기에 오히려 신앙생활을 어렵게 만듭니다. 1997년 겨울, 필자는 잘 아는 목사님의 미국 순회 집회에 동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기에 참 설레었는데, 이상하게도 목사님은 비행기에 타자마자 안대를 하고 바로 주무시는 것이었습니다. ‘비행기를 많이 타보셔서 저러시나?’ 하고 생각한 필자는, 초보(?)답게 연신 창밖 하늘 풍경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마침내 LA 공항에 도착했는데, 신기하게도 한국에서 아침에 출발하여 12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아침이었습니다. 그때 한국과 미국 간의 시차(時差)가 주었던 어려움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집회 장소에서 저는 연신 목사님 앞에서 인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목사님 얼굴 뵙기가 너무 미안했고, 그제서야 비행기를 타자마자 안대를 끼고 주무셨던 목사님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 발을 내디딘 후에도 여러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한국과 다른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운전석과 차선이 정반대인 운전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익숙해졌지만 영어 설교는 쉽지 않았습니다. 어순과 시제 등 한국어와 다른 영어에 익숙해지지 않아서입니다. 이처럼 다르기 때문에 오는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내가 복을 줄테니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던 아브라함은 자기 생각과 달리 그 땅에 기근이 있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의 인도를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다가 떠나는 것을 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들 역시 자기 생각과 다른 말씀 앞에서 “이 말씀은 어렵도다.”(요 6:60)하면서 결국 예수님을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앙의 기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사 55:7~8) 하나님은 그냥 돌아오라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다른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하는 신앙생활은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진리로 믿고 따라가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쉽고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
"사랑은 눈물의 씨앗" 위는 유명한 대중가요 제목이자 영화 제목입니다.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단어 중 하나가 사랑이라고 하는데, 왜 많은 사람이 갈구하는 사랑을 눈물의 씨앗이라고 할까요? 사랑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스승과 제자와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연인간의 사랑 등등. 그런데 크게는 인간의 조건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으로 나누어집니다. 조건적인 사랑은 말 그대로 조건을 따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학벌, 재산, 외모 등 흔히 결혼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좋은 조건들을 갖춘 사람이 받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조건을 갖추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하지만 조건적은 사랑은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랑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즉, 조건을 사랑하는 것이지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조건이 사라지면 사랑도 변질되어 사랑이 눈물과 불행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조건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기에 한번 사랑하면 변하지 않고 영원히 사랑하는 참된 사랑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사랑을 가지신 분만이 아니라 사랑의 근본이시기에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랑을 받기 위해 좋은 조건을 갖추듯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도 조건을 갖추려고 합니다. 가령 선하게 살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한 것으로 심각한 착각입니다. 또 다른 오해는 조건적인 사랑은 아무나 받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나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건적인 사랑은 조건을 갖춘 사람만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기에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오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의 대상을 아래와 같이 밝히셨습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롬 9:13) 위의 말씀처럼 하나님도 누구나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을까요?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창 25:28)는 말씀처럼, 에서는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조건을 따라 사랑을 받았고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데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조건적인 사랑은 조건을 따라 사랑하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은 무조건을 따라 사랑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사랑을 받으려면 조건을 갖추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조건을 무너뜨려야 됩니다. 아무 조건 없이 자신 그대로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나아오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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