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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 Way에서 The Way로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 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다.”(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 27조) 1517년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대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재정적 방편으로 특별 면죄부 발행을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인 요한 테젤은 독일의 도시들을 다니며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죽은 가족들의 죄까지도 사함 받을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이미 로마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구원자임을 발견한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거짓된 가르침에 반발하여 같은 해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이는 종이 한 장에 불과했지만, 온 세상을 종교개혁의 불길로 뒤덮는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은 친히 당신 자신을 위와 같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길이 어떤 종류의 길이냐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the' 는 정관사로 ’유일한‘ 이란 의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길들 중 한 길인 ’a way‘ 가 아닌, 유일한 길인 ’the way'인 것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이는 위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구세주로 오직 예수님만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란 이름 자체에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또 그 어떤 것도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구원의 길이나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 2:22) 하지만 예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Anti-Christ)는 오직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한 채 다른 구원자와 다른 구원의 길을 만들어 사람들을 속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죽은 후 좋은 곳에 간다.’는 관념을 심거나, 이교도들에게는 특정 종교의 창시자를 구원자로 믿게 하든지 ‘갠지스강에서 목욕하면 죄를 씻는다.’는 등으로 말입니다.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히 10:8) 심지어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겨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려온 속죄 제사와 예물조차도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이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로마카톨릭은 예수님만을 유일한 구원의 길로 믿지 않은 채, 인간의 선행과 고행 그리고 고해성사 등을 통한 구원의 길을 만들었고, 급기야 면죄부까지 판매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이 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면 어떤 모습일까? ... 술집은 모두 문을 닫을 것이고, 도색물들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깨끗해진 거리는 서로 웃음을 머금은 보행자들로 가득 찰 것이다. 저주 악담도 사라질 것이다. ...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마이클 호튼, Christless Christianity 중) 현대 기독교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인 마이클 호튼의 위의 언급처럼,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유일한 진리이며 유일한 생명임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일에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종들은 아래와 같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모든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모든 것 되시는 이시여, 당신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없는 보화가 어디 있나이까?”(호라티우스 보나르, Hymns by Horatius Bonar, p.219) “그리스도의 보혈의 교리로부터 떠나는 그 순간 기독교는 엉터리가 되어 버린다. 그 이유는 성경의 모든 가르침이 하나의 이야기,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디엘 무디, Evangelical Spirituality, Chapter 7) “예수님만을 기억하십시오. ... 그리고 그분을 제외한 용서나 칭의나 성화 등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제임스 고든, 복음주의 영성, p.204) 결론적으로 종교개혁의 핵심은, 예수님만이 ‘the way, the truth, the life'가 되시는 것입니다. 즉, '오직 예수(Solus Christus)'인 것입니다. 만일 어떤 교회에서 예수님이 'the way'가 아니라 ‘a way'가 되어 있다면 이미 타락한 것이고, 예수님 외에 다른 이름을 가진 구원자를 믿고 있는 기독교 단체가 있다면 적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힌 이단이나 사이비인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3. 교회의 본질 회복
“참된 신앙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것의 자유로운 주인이 되게 하고,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게 한다. 우리는 왕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자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영원한 제사장들이기도 하다. 이것은 왕이 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제사장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거룩한 일들을 서로 가르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마르틴 루터, 그리스도인의 자유 1521) 위의 글은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전 신자 제사장(Priesthood of All Believers)’ 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는 모든 성도가 제사장으로 서로 동역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제사장이라는 중보 역할의 직책이 있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만나는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들어가고 휘장이 가로막혀 있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실 때 그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히 10:20)라는 구절처럼, 새로운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 후 예수님을 믿어 성도가 되면 중보자가 필요 없이 누구나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라는 구절처럼, 모두가 하나님의 제사장들로 기도와 찬송을 드리고 가르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 모두를 왕 같은 제사장들로 삼으셨습니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만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을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별하는 것을 혐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기도와 찬양을 드리며 가르칠 수 있습니다.”(찰스 스펄전, 1855. 1. 28 주일설교 중) 동 시대의 전도자 디엘 무디처럼, 신학교를 다니지 않고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채 성령의 은사만으로 설교자와 목회자로 세움을 입은 스펄전은 위와 같이 교회 안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별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교회 내에서의 구별은 중세 암흑기를 가져온 로마카톨릭의 유산으로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요삼 1:9) 같은 자들이 일어나 교회의 본질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중세에 기독교화 된 유럽이 신앙의 암흑기를 거쳐야 했던 이유는, 로마카톨릭 내의 계급화 때문이었습니다. 왕, 신하, 백성 등으로 계급화된 당시 국가들처럼, 로마카톨릭도 교황, 사제, 평신도 등으로 구별되면서 모든 성도가 제사장들인 교회의 본질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성경과 다른 잘못된 가르침이 지도층에서 대두되어도 계급화에 눌린 평신도들은 분별없이 받아들여 왜곡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용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주 신부들에게 죄를 고백해야만 하는 것이다.”(1984년 12월 11일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137페이지) 특히, 심각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사라진 중보자들이 로마카톨릭에서 부활(?)하여 위와 같이 구약 시대 제사장들처럼 평신도들의 죄를 사하는 일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생명의 길을 가로막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딤전 2:5)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참된 속죄의 길에 무지함으로 종교개혁의 발단이 된 면죄부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교회에는 성령의 은사를 따라 여러 직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높고 낮은 차이가 아니라, 똑같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엡 5:30)으로서 “피차 가르치며 권면”(골 3:16)하고 “피차 복종”(엡 5:21)하며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갈 5:13)하는 가운데 “서로 같이 돌보게”(고전 12:25) 됨으로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엡 4:12)인 것입니다. 특히, 목회자의 신앙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에 대한 목회자의 신앙에 따라 교회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고 충고했습니다. 여기서 ‘주장하다’는 ‘lords over’(KJV)로 ‘군림하다, 명령하고 지배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성도들에게 군림하여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성도들의 본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성령이 충만하더라도 자신만이 하나님과 대화하며 자신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비전을 받는다고 믿게 되면 교회에서 성령님을 질식시키는 죄를 범할 수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그런 목사들은 자기만이 성령 충만하면 된다는 생각 때문에 교인들의 성령 충만을 등한시하거나 이를 방해할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목사들은 교회 성장에는 성공할 수 있으나 교인들의 영적 성장에는 성공할 수 없다.”(뉴스앤조이, 2007. 7. 20) 위와 같이 목회자가 자신만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는 것은, 전 성도를 제사장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큰 착각인 것입니다. 목회자의 역할은 성도들이 능히 제사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마치 운전 강사로서 운전자들 각자가 길을 따라 운전을 잘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되는 것이지, 성도들을 자신의 차에 태워 자신의 뜻에 따라 핸들링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교회에는 언제인가부터 중세 로마가톨릭 시대의 사제주의가 되살아나 목사들이 당회장권, 강단권, 설교권, 목양권, 축도권, 안수권 등의 이름으로 제사장적 기능을 특수화하고 교권을 강화시켜 교권을 남용하고 있다. 목사의 교권 남용은 교회 재정의 횡령, 목회 세습, 목회자의 성윤리 문제 등 비도덕적인 문제들로 나타나게 됐을 뿐 아니라,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으로 목사의 권위를 강조해 평신도들을 우민화시켰다.”(정일웅 박사, 총신대 전 총장) 최근 제2의 종교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데, 무엇보다 위의 지적처럼 계급화된 직분에서 종교개혁의 핵심인 ‘전 신자의 제사장’이란 교회의 본질이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도 모두가 성령의 인도를 바르게 받는 참된 제사장들로 살아간다면, 성도들도 행복한 삶을 살 뿐만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의 온전한 행복을 전해주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교회의 역할도 회복될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2. 신앙의 기준 회복
“성경에 의해 확신을 갖지 않는 한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수용할 수 없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으므로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다.”(마르틴 루터)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으면 바르고 건전한 신앙의 극히 작은 부분도 얻지 못한다.”(존 칼빈) 500년 전, 위와 같이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가 신앙의 기준을 교회의 권위, 특히 교황의 권위에 둔 것에 항거하여 오직 성경만이 무오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의 유일한 기준임을 강조하며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사실 인류의 타락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위와 같은 사탄의 속임수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고, 교회의 타락은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신 하나님과 같이 무오한 존재로 세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황권의 대낮은 세계의 한 밤중이었다.”(역사가 J. A. Wylie) 1229년부터 로마카톨릭은 평신도들의 성경 보유 자체를 금지했기에, 신도들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라는 진리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이 아닌 종교 지도자들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로 인해 중세 암흑시대가 발생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바나바와 바울이 ...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행 14:14,15)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그에 반해 초대교회 사도들은 위와 같이 자신들이 일반인과 다름없는 사람임을 강조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주목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고 있을지라도 근본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진리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그렇게 시작했다. 몇 달 새 장로들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온 담임 목사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를 비난했던 미리암이 받은 형벌에 대해 기록된 민수기를 읽어나갔다. 단단히 작심한 양 설교자의 입에서는 리더에게 저항하다 파멸한 성경 안팎의 사례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 그것은 설교라기보다는 위협이나 한풀이에 가까워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배시간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리였기에 누구도 제지하거나 불만을 터뜨릴 수 없었다. ... 목회자라는 자리는 한국교회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카톨릭의 ‘교황무오설’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 개신교회가 한국에서는 오히려 ‘목회자무오설’이라는 도그마에 사로잡히며 전철을 밟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다.”(한국교회 자화상, 기독신문, 2011.11.29) 위의 기사를 통해 오늘날 한국 교회도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핵심 중 첫번째가 사람, 특히 종교지도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을 부인한 채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신앙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목회자는 아래의 언급처럼,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청지기일 뿐입니다. 결코 성경을 대신하여 신앙의 중심에 설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들은 주님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들이 교회를 위하여 있는 것이지 교회가 목회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찰스 스펄전, '목회자들을 위하여' 중)
1. 하나님의 의 발견
“나는 하나님의 의를 싫어했다. 나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죄인들을 벌주시는 분으로 배웠다. 내가 비록 신실한 수도사로서 살았지만, 언제나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무거운 양심의 가책 속에 있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자비로움으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는 말씀을 밤낮으로 명상하면서 말씀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진력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복음을 믿음으로 부여받아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새로 거듭나서 열린 문들을 통하여 낙원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부터 ‘하나님의 의’는 낙원으로 인도하는 가장 달콤한 단어로 찬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서 전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마르틴 루터, 라틴어 저작 서문 중) 1517년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대해 저술한 위의 글을 보면, 종교개혁의 씨앗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발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는 거룩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수 요소인데, 의(義)라는 한자를 분석해보면 羊(양)이란 단어가 我(나)라는 단어와 하나가 되어 위에 서 있는 모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는 말씀처럼, 양은 죄 없고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에 진정한 의는 내 위에 예수 그리스도가 세워져 악한 나 대신 거룩하신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참된 의인은 자신의 의가 아닌, 예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나타내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마태복음 21장에서 부정한 짐승인 나귀가 거룩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때 예수님이 그 위에 타심으로 부정한 나귀의 모습이 아닌,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나귀를 환영하는 모습과 일치됩니다. 그때 만일 나귀가 혼자 들어갔다면 그 자신이 가진 어떤 것으로도 그러한 대접은 받을 수 없습니다. 중세 로마카톨릭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크게 오해한 채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우리 자신의 의를 준비해서 들고 가도록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가인의 제사와도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도 마찬가지였기에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1~3) 종교개혁의 가장 기본이 되는 핵심은 인간의 의에서 하나님의 의로의 전환입니다. 오늘날도 두 가지 의의 길이 있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의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의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혹은 아직도 중간 위치에서 혼돈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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