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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참 신앙은 '오직 예수'
진정한 변화는 오직 예수! 변화산의 기적(마 17:1-13)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8)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도 변화를 원하고 하나님 역시 변화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변화인가?’ 입니다. 변화는 크게 참된 변화와 거짓된 변화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참된 변화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면의 변화이고, 거짓된 변화는 인간이 원하는 외형적 변화입니다. 마태복음 17장의 본문은 흔히 '변화산의 기적'이란 제목으로 공관복음에서 모두 다루고 있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먼저 당신의 용모가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놀랍게도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양옆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에 감격한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고 모두를 섬기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구름을 보내셔서 오직 예수님만 드러내시며 예수님의 말만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나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 등 비록 하나님이 쓰신 종들일지라도 그들을 주목하는데서 눈을 돌려 유일하신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예수님만 주목하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참된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루시퍼 및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모든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고 따르지 않음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중세 암흑 시대를 만들었던 로마 카톨릭도 오직 예수님만 믿은 것이 아니라, 당시 종교지도자 특히 교황도 함께 신뢰하도록 했는데, 결국은 '교황무오설'로 발전되고 급기야 면죄부 판매까지 허용될 정도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다섯가지 종교개혁의 원리인 'Five Solas'로 개혁을 시작하고 진행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 내외부에서 제2의 종교개혁을 부르짖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목회자를 비롯하여 인간을 신뢰하는 인본주의 신앙에서 다시 종교개혁 신앙의 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히리안의 변화 오래 전 뉴욕의 할렘가에서 가난한 흑인 아이들을 돌보며 자선 사업을 하는 한 백인 여인이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늘 풀이 죽어 있는 앉은뱅이 소년인 히리안의 다리를 낫게 해주려고 여러 곳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마침 한 의사가 무료로 수술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하여 히리안의 다리가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어느 겨울 밤에 우연히 거리에서 그때의 여인과 의사가 만났습니다. 자연스럽게 의사는 히리안이 잘 성장하여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물었는데, 한참을 머뭇거리던 여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 히리안은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려 나쁜 짓을 하며 살다가 ... 얼마 전에는 사람을 죽여서 지금은 ... 감옥에 있습니다.” 히리안의 다리만 낫게 해주려고 했던 여인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주는 어떤 외형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지만 진정한 변화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외형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마음의 변화는 오직 예수님만 주목하고 그분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변화산의 참된 기적 본문이 기록된 마태복음에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 달리 변화산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변형된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라고 표현하셨고, 3절에서는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하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는 변화된 모습도 보여주셨는데, 이러한 변화는 예수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변화였습니다. 외모도 볼품 없고 나사렛 출신으로 무시받던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면서 베드로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름을 보내셔서 그들을 덮으시더니 예수님에 대해서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변화산의 기적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신 기적을 일으킨 사건인데, 하나님은 단순히 외형적으로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제자들을 이끌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를 포함하여 어떤 사람일지라도 제자들은 물론, 우리 역시 따라야 할 대상은 오직 예수님 뿐으로 예수님의 음성만을 듣는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후 예수님의 수제자로 자처할 정도로 예수님과 밀접했던 베드로도 예수님만이 아니라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 곧 모세와 엘리야 등도 따르고자 하는 마음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수님도 믿지만 사람도 여전히 기대하고 있는 베드로의 마음에 오직 예수님만을 따르는 진정한 변화를 주기를 원하셨기에 변화산의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당신을 따르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 부인은 자기 자신은 물론, 모든 인간을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 3:4)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은 다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거짓되다’는 진리 위에 ‘오직 하나님만이 참되시다’는 진리가 세워질 수 있고, 그로 인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는 신앙의 핵심 진리도 세워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다른 음성에도 귀를 기울이면 결국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락과 개혁의 구심점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시 58:4)라는 말씀처럼, 성경은 사탄에 속한 사람들의 특성을 귀머거리 독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뱀의 첫 번째 특징은 귀가 없다는 것인데, 동물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실제로 귀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귀가 퇴화되어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원래 귀는 밖의 소리를 듣기위해 존재하는데, 뱀의 귀는 자기의 소리만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14장에서는 타락하기 전의 천사장 루시퍼가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사 14:13)라고 하나님의 음성만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에게 스스로 이야기하면서 타락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음성에 이끌려 살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도 참된 양의 특징을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음성만 듣고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즉, 창조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다면 어느 피조물도 타락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안에서 복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루시퍼는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기울이지 않고 자기 소리를 들음으로 결국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뱀을 통해 나타나 하와에게도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고 하나님과 다른 음성으로 접근했습니다. 불행하게도 하와는 사탄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그로 인해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지 않고 사탄의 음성을 받아들이면서 인류의 타락은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타락 역시 불완전한 인간인 교황을 완전하신 하나님과 같이 무오한 존재로 세우고 그 음성을 따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황권의 대낮은 세계의 한 밤중이었다.”(역사가 J. A. Wylie)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목회자 무오설 = 교황 무오설 로마카톨릭은 예수님만 믿게 한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도 교황도 믿게 했는데, 결국에는 1229년부터 평신도들의 성경 보유 자체를 금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황의 말에 더 권위를 내세우며 교황무오설로 흘러갔고, 신도들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라는 진리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이 아닌 교황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을 믿고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중세 암흑시대가 발생했고, 마침내 면죄부까지 판매하면서 종교개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로마카톨릭의 타락 원인을 파악한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다섯가지 종교개혁의 원리인 ‘Five Sola(다섯가지 오직)’로 개혁을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사도들도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고 하면서 자신들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강조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주목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고 있을지라도 근본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진리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상당수의 목회자들에게서 이렇게 자신을 부인했던 사도들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목회자라는 자리는 한국교회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카톨릭의 ‘교황무오설’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 개신교회가 한국에서는 오히려 ‘목회자무오설’이라는 도그마에 사로잡히며 전철을 밟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다.”라고 ‘한국교회 자화상’이란 제목으로 기독신문에서 2011년 11월 29일자에 나온 기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통해 오늘날 한국 교회도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핵심 중 첫 번째가 사람, 특히 종교지도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을 부인한 채 ‘오직 성경’ ‘오직 예수’만이 신앙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목회자는, 찰스 스펄전이 그의 저서인 <목회자들을 위하여>에서 “목회자들은 주님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들이 교회를 위하여 있는 것이지 교회가 목회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청지기일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코 성경을 대신하여 신앙의 중심에 서지 말고, 모세와 엘리야를 구름으로 덮으시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들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신앙의 핵심, 구속한 주만 보이는 것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오신 분으로 당신 자신에 대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하셨는데, 영어 성경을 보면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일반 관사인 ‘a’ 가 아니라 정관사인 ‘the’ 가 사용된 것은 여러 길 중에 한 길이 아니라 ‘오직 한 길’, ‘유일한 길’이라는 의미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러 길 중에 한 길로 믿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길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중세 암흑시대를 가져온 로마 카톨릭의 타락은 오직 예수님만 믿은 것이 아니라 교황이나 사제 등 종교 지도자들도 신뢰하면서 시작되었기에, 종교개혁자들은 신앙 개혁의 기치를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께 영광’ 으로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오직 예수님만 믿는 신앙이 참된 신앙의 핵심입니다. 본문에서 모세와 엘리야 등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을 부인하지 못했던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통곡하며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순절에 성령을 모셔들이면서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3장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면서 자신은 물론 함께한 사도 요한도 부인한 채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오직 예수님만을 나타내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미국의 부흥을 이끈 디엘 무디도 “성직자나 교회 등 장대에서 눈을 떼어 장대 위의 그리스도만 보십시오!”라고 충고했는데, 참된 신앙은 자기와 인간을 부인하고 오직 목자되신 예수님의 음성만 듣는 것입니다. 이는 민수기 21장 9절의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는 말씀처럼 놋뱀되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고, 요한복음 10장 27절의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라는 말씀처럼 유일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만 듣는 것입니다. 찬송가 288장 가사 중에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보아야 하고 믿어야할 대상은 오직 구속한 주, 예수님 뿐입니다. 즉, '오직 예수'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래의 말씀처럼, 자기를 비롯하여 모든 인간 곧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보이는 것, 다시 말해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 참 신앙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8)
7. 정통교회와 이단의 특징
1) 전통의 단일 원천설(single-source theory)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자는 전 세계의 모든 교회에 이미 알려져 온 사도적 전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이레나우스, 이단반박)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캅에게서 신앙을 배우며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조직신학자’이자 초대교회의 감독이었던 이레나우스(Irenaeus)는, 수많은 그릇된 사상으로 각종 이단을 배출하여 ‘이단의 원조’라고 불리는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한 그의 저서에서 위와 같이 진리는 특별한 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적 전통’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전통’이란 문자적으로 ‘건네받은 것’을 뜻하며 ‘전달하는 행위’ 라는 뜻도 내포한다. ... 올바른 경전 해석은 참된 기독교 신앙과 훈육을 보존하는 곳에서만 찾을 수 있다. 전통은 사도들에게 받은 유산으로 간주되었고, 이로서 교회는 경전의 올바른 해석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 전통은 경전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보장하는 수단으로 간주된다.”(알리스터 맥그래스, 신학의 역사) 종교개혁 시대와 마르틴 루터 연구의 권위자인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위의 해석처럼, 전통은 ‘전달하고 건네받은 것’이란 의미이기에 ‘사도적 전통’은 사도들로부터 전달된 것을 건네받은 ‘사도들의 유산’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도적 전통이 있는 곳에는 개개인의 자의적인 해석이 방지되며, 사도들의 가르침이 보장됨으로 참된 기독교 신앙이 보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통을 이은 신앙 규범에 어긋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테르툴리아누스) 특히, 이레나우스를 이어 초대교회 이단들을 반박한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도 위와 같이 초대교회의 전통으로 이어온 신앙 교리들과 다른 사상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바른 믿음 위에 세워질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전통 교리에 대한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에 대한 전통의 ‘단일 원천설(single-source theory)’이라고 합니다. “이단들은 성경에 의해 반박을 받으면, 마치 성경이 옳지 않거나 권위를 갖지 못한 것처럼 성경 자체를 비난한다. 성경은 다양한 진술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전통을 알지 못하는 그들이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이레나우스, 이단반박) 또한, 이레나우스는 위와 같이 교회의 전통 교리를 알지 못하면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며 전통적 성경 해석을 매우 중요시 여겼습니다. 이는 ‘성경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과 같은 다양한 해석에 따른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성경에 대한 바른 척도인 ‘단일 원천설’에 따라 사도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적 해석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진리를 다른 곳에서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사도들은 이 진리를 교회라는 보고 속에 온전히 축적해 놓아서, 누구나 원하는 자는 교회를 통해 이 생명수를 길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문이다. 이 문을 통하지 않는 자는 강도요 도적이다.”(이레나우스, 이단반박)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 3:10)라는 말씀처럼, 당신의 교회를 통해 각종 지혜를 알려주시기로 정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위의 이레나우스의 언급처럼,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를 얻으려고 하면 반드시 교회의 전승된 전통적 가르침에 주목하고 온 마음으로 배워야만 합니다. “초대교회는 감독을 중심으로 한 교권 체계와 각종 신조들을 만들어 내면서 정통 교회를 수립하게 되었다.”(김신호 미주장신대 교수, 이단 바로 보기, p.76) 특히, 초대교회가 2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회의 기둥이자 최고의 권위자였던 사도들이 순교나 노화로 세상을 떠나자 각종 이단에 대한 대처와 함께 바른 신앙을 고수해야 되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그러자 위의 언급처럼, 초대교회는 감독 중심으로 교회 조직을 정비해 감독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계승하도록 함으로 사도들의 신앙 유산을 보존하고 전승되도록 한 것입니다. 2) 이단, 폐쇄된 독선(獨善) 교리 창출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요1서 2:19,26) 사도들이 생존했던 초대교회 당시에도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생들, 곧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위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분리됨으로 결국 이단으로 발전된 것입니다. 이단으로 번역된 헬라어 ‘하이레시스(hairesis)’는 ‘하이레오마이’에서 유래된 단어로 ‘스스로 선택(free choice)’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즉, 이단은 위와 같이 멸망조차 ‘스스로’ 곧 ‘자의적으로’ 선택하는 자들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이단들은 신앙의 교리들을 자의적으로 선택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 이단의 다른 헬라어인 ‘하이레티코스’는 ‘하이레오’(선택하다)와 ‘헤테로스’(다른)의 합성어로서, ‘다른 것을 선택하다’는 뜻입니다. 즉, 이단은 진리가 아닌 다른 것을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믿습니다. “이단들은 성경의 말씀을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경의 내용을 가감하여 왜곡시킨다. 성경을 임의적으로 해석하여, 진리를 왜곡한다.”(터툴리안,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17장) ‘삼위일체(Trinity)’를 비롯한 신학 용어 982개를 만들며 기독교 신앙을 명료하게 정립한 ‘아프리카 최고의 신학자’로 불리는 터툴리안(Tertulian)은, 위와 같이 이단들은 성경을 임의적으로 해석함으로 결국 진리를 왜곡시킨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에 흐르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이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 계속 흘러 내려온 것이기에, 흐르지 않는 폐쇄된 곳은 이 진리를 공유할 수 없습니다. “가장 파괴적인 이단들이 사용하는 마인드 컨트롤은,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파괴한 후 이단 교주의 이미지에 맞춰 정체성을 재구성함으로 개인의 사고와 감정과 행동을 조정한다.”(스티브 하산, 엑스포 컨퍼런스 강연) 한때 Ex-Moon 이라는 통일교 교주의 성(姓)을 딴 회사도 창립할 정도로 통일교에 심취해 있다가 탈퇴한 후 미국의 이단 경각 네트워크에서 활동하며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 있는 이단 대책 전문가 스티브 하산은, 위의 언급처럼 이단 내부에는 교주를 중심으로 하는 마인드 컨트롤이 강력히 작동하는데, 이는 폐쇄적인 정보의 통제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즉, 외부 가르침을 차단한 정보의 폐쇄화로 내부, 특히 교주의 가르침만 추종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 10:16) 위와 같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한 제자들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 직접 듣지 않아도 제자들의 가르침을 받으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고후 4:13)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을 공유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가르침을 받은 아나니아로부터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얻었고, 바울이 전한 가르침을 받은 디도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얻으면서 바울과 디도는 같은 믿음으로 아래와 같이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딛 1:4,5) 그렇기에 정보의 통제로 폐쇄된 이단은, 믿음의 선진들을 통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흐르지 않기에 참 하나님의 교회와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엡 4:4~6)라는 말씀처럼, 참 하나님의 교회들만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단은, 아래와 같이 사도들이 전해준 예수, 성령, 그리고 복음이 아닌 다른 것들을 받아들임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결국, 정보의 통제로 폐쇄되어 전통의 ‘단일 원천설’을 따라 믿음의 선진들로부터 배우지 않고 같은 믿음이 흐르지 않은 채 자기들만의 독선적인 교리 안에 머물면 누구나 이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이단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이단을 ‘정통 기독교의 신앙 교리를 벗어나 자신들만의 비정상적인 성경 해석을 가진 모임’으로 정의했습니다. “이단 종파란 어느 한 특정인의 비정상적인 성경 해석을 중심으로 한 극단주의자들의 모임이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주요 골자에 있어서 한결같이 정통 기독교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상통한다.”(The rise of the Cults, p.12) “이단 종파란 성경에 입각한 기독교 신앙을 임의로 변형 왜곡시키고 역사적 근거를 가진 교회의 교훈을 배척하는 집단을 지칭한다.”(죠쉬 멕도엘 & 돈 스튜어트, 현대종교 연구시리즈) 결론적으로 이단은, 하나님의 마음과 흐르지 않은 채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입었다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다른 민족들을 무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교황만 하나님의 무오한 종으로 여기며 다른 복음적인 교회들을 무시했던 중세 로마카톨릭 교인들처럼, 자기 단체의 종교지도자만 하나님의 특별한 종으로 여기면서 자기 단체만 참 하나님의 교회로 여기는 독선에 사로잡혀 믿음의 선진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는 영적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6. 십자가, 이단 방지의 구심점 Ⅱ
2) 모든 믿는 자의 본(本) “목회 영성을 쌓아갈 때, 십자가의 수직과 수평이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부조화와 불균형으로 바른 교회를 이룰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스펄전의 목회 영성은 누구보다도 수직과 수평의 조화를 잘 이룬 영성이었다.”(기독신문사, 찰스 스펄전의 목회 비전, p.151) 십자가의 수직과 수평이 조화를 이룬 영성을 가졌다는 위의 평가는 스펄전을 가장 잘 표현한 것입니다. 즉, ‘설교의 황태자’로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설교자이자 목회자였던 스펄전은 설교 사역은 물론, 목회, 부흥, 기도, 전도, 저술, 교육 등 모든 부분에 모범이 될 수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함께 믿음의 선진들과의 수평적 관계를 누구보다 잘 맺었기 때문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지난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찰스 스펄전도 말 그대로 청교도들과 더불어 살았던 사람입니다. 청교도들의 작품에 대해서 스펄전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타협할 수 없는 진리, p.194) “칼빈과 청교도 주석가들은 평생 동안 스펄전의 유일한 스승이 되었다.”(기독신문사, 찰스 스펄전의 목회 비전, p.148) ‘20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자’로 알려진 마틴 로이드 존스와 스펄전의 생애를 연구한 기독신문사의 스펄전에 대한 위의 언급처럼, 스펄전은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아 그들의 신앙이 담긴 청교도 서적을 매주 6, 7권씩 정독함으로 종교개혁 후 300년 동안 축적된 청교도 신앙이 담긴 서적 7천여 권을 섭렵한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청교도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지금 나에게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조상들의 증언들과 모순된 것이 없습니다. 내가 전파하는 교리는 바로 청교도들의 교리입니다. 즉, 그것은 바로 칼빈의 교리요, 어거스틴의 교리요, 바울의 교리요, 성령님의 교리입니다.”(찰스 스펄전, C.H. Spurgeon, p.221) 위와 같이, 스펄전의 신앙은 스스로 창출한 자신만의 신앙이 아니라, 청교도들과 칼빈, 그리고 어거스틴과 바울 등 앞선 영적 선진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아서 계속 이어져 내려온 위대한 신앙의 유산(遺産)이었습니다. 그 결과 스펄전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바르고 참된 신앙의 상속자가 될 수 있었고, 가장 모범적인 설교자와 목회자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살전 1:6,7) 바울은 초대 교회 당시 여러 교회들 중 데살로니가 교회를 모든 믿는 자의 본으로 정했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님과 함께 앞선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찰스 스펄전이나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수직적으로는 주님을 본받고, 수평적으로는 앞선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는 ‘십자가 신앙’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 믿음으로 노아는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 믿음으로 이삭은 ... 믿음으로 야곱은 ... 믿음으로 요셉은 ... 믿음으로 모세는 ...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히 11:4~32) 믿음의 장(章)인 히브리서 11장 역시, 위와 같이 아벨부터 시작해서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을 하나씩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바른 믿음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경험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는 참 믿음을 가지려면 히브리서 11장처럼 종교개혁자들과 그 신앙의 후예인 청교도들에게 주목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함을 아래와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청교도들에게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은, 우리가 구약시대의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히브리서 11장의 가르침과 동일한 이치입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타협할 수 없는 진리, p.194) 본 연구소는 스펄전을 통해 청교도들의 신앙에 주목하면서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는 물론, 하나님의 사람들과의 수평적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그때부터 본 연구소는 스펄전을 십자가 신앙의 영적 멘토로 삼아 스펄전이 했던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신앙 유산을 배우고 정립하여 전하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겠다는 사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스펄전의 사역은 오웬, 칼빈, 어거스틴, 그리고 그리스도의 옛 교리들을 되살리는 것이었다.”(리차드 데이, C.H. Spurgeon, p.224) “스펄전이 일생 동안 전하고 가르쳤던 것은 바로 청교도 사상과 교리였다.”(기독신문사, 찰스 스펄전의 목회 비전, p.311) 특히, 스펄전의 대표적인 명저인 [All of Grace]의 머리말에서 스펄전이 중요시하며 언급했던 “주님의 유일한 목적은 당신의 행복이다.”(All of Grace, p.11) 는 가르침에 따라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신앙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한 행복'을 얻는 길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5. 십자가, 이단 방지의 구심점 Ⅰ
1. 개혁 신앙의 핵심, 십자가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부패한 로마카톨릭교회의 타락으로 인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인 종교개혁을 시작한 마르틴 루터는,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당시 로마카톨릭이 강조하던 ‘영광의 신학’은 거짓된 신학이고, 참된 신학은 십자가뿐이라는 ‘십자가 신학’을 강조했습니다. “율법은 말한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은혜는 말한다. ‘그를 믿으라.’ 그러면 모든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마르틴 루터, 하이델베르크 논제 26) ‘영광의 신학’은 인간의 공로에 의지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율법적 신학’으로 로마카톨릭 신앙의 구심점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십자가 신학’은 위와 같이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오직 믿음’에 초점을 맞춘 ‘은혜의 신학’으로 개혁 신앙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1) 수직과 수평, 두 관계의 크로스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개혁자들의 신학 사상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십자가 은총’이다. ... 중세를 끝장낸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의 신학도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재발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교회가 타락하고 몰락할 때마다 ‘십자가’가 재등장하였다. 교회의 근거이자 존재 이유인 ‘십자가’를 재발견한 개혁자들의 메시지와 실천을 통해 교회는 다시 세워지는 역사를 반복하였다.”(아이굿뉴스, 2019.1.22) 위와 같이 개혁자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재발견해왔는데, 사실 십자가는 수직 막대와 수평 막대가 하나로 크로스된 모양으로, 수직 막대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수평 막대는 사람들,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당연히 우선시 되어야 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과의 관계도 아래와 같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서머나 교회와 함께 주님의 책망을 받지 않은 빌라델비아(Philadelphia) 교회의 이름은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 ‘필로스(philos)’와 형제를 의미하는 ‘아델포스(adelphos)’의 합성어로 ‘형제 사랑’이란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과의 수직적 사랑은 물론, 당신의 사람들이 서로 연합하고 함께하는 수평적 사랑도 매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위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당신과의 관계와 하나님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서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수직 막대와 수평 막대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하는 수직적 연합과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수평적 연합은 따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모세 개인의 하나님이 아닌 조상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셨습니다. 즉, 특정인이나 특정 시대에만 나타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과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함께하시는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행 7:25) 위와 같이 조상의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40세 때 모세는, 왕자의 위치와 애굽의 학술 등 좋은 조건들을 가진 자기를 통해 일하실 자기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좋은 조건들이 모두 사라진 80세가 되었을 때에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타오르는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조상의 하나님을 만난 후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행 8:29~31)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행 9:17) 위의 내용처럼, 성경을 탐독해도 깨닫지 못했던 구스 내시나 율법을 따라 교회를 핍박했던 사울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인 빌립과 아나니아를 만나게 하셔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전달해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믿음을 먼저 허락하신 당신의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후에 믿는 자들도 그 믿음을 함께 공유하도록 이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행 15:2) 또한, 위와 같이 초대 교회 당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람들로 인해 교회 안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 등 소요가 일어났을 때에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믿음 위에 세워져 있던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고 하나이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니케아 신경) 사도신경과 아나타시우스 신경과 함께 기독교의 3대 신경으로 불리우는 니케아 신경(Symbolum Nicaeno-Constatinopolitanum)에서는 참된 교회의 4가지 속성으로 위와 같이 유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 등을 드는데, 그중 3가지 속성인 유일성, 보편성, 사도성은 앞선 믿음의 선진들과의 관계, 다시 말해 수평적 만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엡 4:13)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하나님의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위와 같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믿음의 지식을 서로 공유하여 하나가 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엡 1:10)된 “그리스도의 몸”(엡 4:12)으로 “몸이 하나”(엡 4:4)라는 말씀처럼, 십자가의 수직과 수평이 이루어진 하나의 교회인 것입니다.
4. 성도와 교인, 양과 염소
“요한 웨슬리가 지옥을 지키는 수문장에게 ‘여기에 장로교인들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수문장이 그렇다고 답했다. 웨슬리가 연이어 성공회교인들, 침례교인들, 감리교인들도 있는지 질문하자, 수문장은 모두 있다고 답했다. 그 후 웨슬리가 천국을 지키는 수문장에게 가서 똑같은 질문을 했는데, 이번에는 모두 없다고 답했다. ‘그럼 누가 천국에 있느냐?’라는 웨슬리의 마지막 질문에 수문장은 ‘천국에는 오직 그리스도인만 있다.’라고 대답했다.”(Biblical Studies Foundation 웹사이트 중) 위는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가 꾼 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참 그리스도인인 성도(saint)와 특정 교회에 다니는 교인(proselyte)의 결국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웨슬리 자신이 오랫동안 교인으로 살다가 참된 성도가 되는 체험을 가졌기에 이러한 꿈을 꾸지 않았나 싶습니다. 1703년 영국의 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요한 웨슬리는 소위 말하는 ‘모태교인’으로, 목사관에 살면서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거룩한 클럽(Holy Club)’이란 신앙 단체의 지도자로, 신학 공부와 경건 생활에 집중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1735년 아메리카 신대륙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대서양을 건너가는 도중 배를 뒤흔드는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죽음의 공포 속에서 떠는 자신의 모습과 그런 자신과 달리 평안한 목소리로 찬송을 부르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으로 신앙의 큰 도전을 받습니다. 자신의 신앙에 회의를 가진 웨슬리는 결국 선교를 실패하고 영국으로 돌아와, 모라비안 교도의 지도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이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했음을 발견한 후, 1738년 5월 24일 런던의 한 집회에서 로마서 주석을 듣던 중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는 믿음을 얻게 됩니다. 지금도 감리교회에서는 1738년 5월 24일을 ‘요한 웨슬리의 회심일’로 지키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웨슬리가 그날 이후 대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전에는 제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신앙인들에게 큰 도전을 주는 충격적인 고백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을 믿고 특정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교인으로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정상적인 기독교인(Christian)’으로 자타의 인정을 받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2,33) 위의 내용은 마지막 때 심판의 장면인데, 모든 사람이 오른편에 서는 양과 왼편에 서는 염소로 나누어질 것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심판의 결과는 서로가 상반됩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즉, ‘하늘과 땅 차이’ 보다 더 큰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전체 내용을 자세히 보면, 놀랍게도 심판을 받는 왼편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이나 다른 종교를 믿는 이교도들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 중에도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마 25:44)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도와 교인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시 37:28)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마 23:15) 위의 말씀처럼, 성도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지만, 교인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지난 시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스페셜 테마에서 언급했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유일한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만이 성도이고, 눈에 보이는 특정 교회에만 속한 사람은 교인일 뿐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래서 예수님도 위와 같이 경고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어도 위와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당신의 뜻을 나타내셨는데, 그 뜻은 위와 같이 ‘하나님처럼 거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온전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과 같은 온전한 거룩함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시 5:4) 위와 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악과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죄를 갖게 되자 그들을 낙원에서 쫒아내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 후 죄인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도록 만드는 유일한 것은 죄 뿐임을 아래와 같이 강조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사 59:2) 그렇기에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을 향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고 하시며, 당신과 같이 거룩해지길 바라셨습니다. 천국에는 “거기 죄인 전혀 없으니 거룩한 자 뿐이라.”(찬송가 233장)는 찬송 가사처럼, 죄인은 한 명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염소는 축복 받은 양의 초장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위대한 목자를 따라 영원한 행복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죄인으로서 아무리 4,50년 동안 많은 봉사와 선행, 심지어 복음의 일을 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결코 너를 알지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찰스 스펄전, Metropolitan Tavernacle Pulpit, p281,282) 찰스 스펄전 역시 위와 같이 심판 받는 염소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 곧 처음 태어날 때의 상태인 죄인의 위치에 머물러 있는 교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죄인의 상태에서 아무리 평생 동안 교회를 다니며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할지라도 결국 염소와 같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죄 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어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온전하게 행하신 역사만이 신자를 의롭게 만들고 정죄와 심판이 없도록 보장한다.”(이안 머레이, Evangelicalism Divided, Chapter 6)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모두 거듭난 사람이고 거듭난 사람은 모두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다.”(존 라일, Being Born Again, Chapter 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 안에 더 이상 ‘죄인’이 없게 하신다. ‘은혜로 구원 받은 죄인’이라는 표현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만일 죄인이라면, 그는 구원 받은 것이 아니다.”(오스왈드 챔버스, The Philosophy of Sin, Chapter 3) 위와 같이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도 죄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 곧 성도가 아니라 거듭나지 못한 교인으로 구분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기에 성도와 교인이 섞이게 되었고, 결국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마 13:49)라는 말씀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많은 말씀을 하신 후 하나님과 같이 온전한 거룩함을 얻어야 된다고 결론을 지으셨습니다. 즉,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과 같은 거룩함(聖)을 얻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 1:2)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신자들을 성도와 교인으로 나누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거듭나지 못한 채 죄인으로 살아가는 교인들이 성도가 될 기회가 있는데, 교인들을 무조건 성도로 부르면 수많은 교인들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뿐더러 결국 무서운 심판까지 받게 되는 심각한 사태가 초래됩니다. “모든 죄를 고백하고 버릴지라도 여전히 죄인이라면, 그는 단지 그리스도인이 되다만 유사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매튜 미드, 유사 그리스도인 p79)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목회자 매튜 미드(Mattew Mead)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類似)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The Almost Christian Discovered> 라는 저서를 통해 상세히 설명했는데, 죄인의 상태는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위와 같이 분명히 선을 그었습니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멋지고 빛나는 것처럼 오늘 한국 교회에도 수많은 유사 그리스도인이 활개를 칩니다.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자신을 검증해야만 합니다. 그릇된 구원의 확신에 안주하다가 돌이킬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유사 그리스도인 도서 소개 중) “그들은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들 중 아무도 스스로를 유사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 안에는 분명히 유사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목사나 전도사도 있고, 장로나 권사, 기타 직분자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옷을 입고 이 시대를 이끌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교회와신앙, 2001년 2월 1일자 목회 단상 중)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를 비롯해 유사 그리스도인이 많은 오늘날 기독교계의 참된 개혁과 부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성도와 교인의 구분인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거룩하고 하나이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Symbolum Nicaeno-Constatinopolitanum) 2017년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주요 기독 언론사들은 2017년 기독교 10대 뉴스를 선정하면서 가장 먼저 ‘종교개혁 500주년’을 꼽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2위로 선정된 사건은 한 대형교회의 세습이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이자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는 교회가 종교개혁 신앙과 반대 방향에 선 것이 큰 이슈가 된 것입니다. 최근 본 연구소에도 참된 교회와 교회 안의 바른 신앙생활에 대한 문의가 와서 이 자리를 통해 답하려고 합니다. 핼버슨 전 미국 상원 채플 목사는 교회가 시대를 따라 ‘철학 - 제도 - 문화 - 기업’으로 변해왔다는데, 사실 교회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면서 여러 오해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려면 교회에 대한 참 의미와 성경적 교회의 모습을 살펴봐야만 합니다. 교회의 영어 단어인 ‘church’는 헬라어 ‘ekklēsia(에클레시아)’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죄악 세상에서 불러 모아진 성별된 자들의 모임’(교회용어사전)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예배당을 혼동하는데, 정확히 교회는 개개의 그리스도인이 모여 복수가 되었을 때 그 모인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예배당은 교회가 예배드리는 장소인 것입니다. 비유로 설명하면, 사병과 부대 그리고 막사와 같이, 그리스도인과 교회 그리고 예배당으로 구분됩니다. 즉, 군인 개개인을 의미하는 사병이 모이면 부대가 되고, 그 부대의 사병들이 군대 생활하는 건물을 막사라고 하듯,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이 모이면 교회가 되고, 교회 성도들이 함께 신앙생활 하는 건물을 예배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 1:2) 위 구절 역시 교회의 의미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꼭 짚고 가야 될 부분은 성도와 교인의 차이입니다.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시 37:28)에서의 성도와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에서의 교인은 천지차이입니다. 즉, 성도(saint)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버림을 받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지만 교인(proselyte)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지 않아 죄로 인한 심판을 받게 되는데도 자신을 신앙인으로 착각해 심판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음으로 오히려 영원한 심판을 피하기 어려운 종교인입니다. 다음 기회에 좀 더 자세히 성도와 교인의 차이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교회는 성도들의 무리이지 교인들의 무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인들이 아무리 많아도 참된 성도들이 없다면 이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에 대해 표현한 아래의 성경 구절을 살펴보면 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 1:23)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엡 5:23)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롬 11:16) 위와 같이 교회와 그리스도는 머리와 몸, 또는 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체(一體)의 관계입니다. 그렇기에 거룩해진 성도들의 무리만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위해서는 거룩해진 교회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해지지 않은 교인들의 모임으로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케아 신조, 사도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 대표적인 기독교 신앙 고백서들 모두가 거룩함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속성 중 하나로 동일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거룩함은 입으로만 ‘거룩한 교회나 성도’로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말씀처럼 하나님과 같은 거룩함이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는 둘 다 동일한 은혜를 받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는 서로 공유하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그 은혜의 기름이 처음 부어지는 머리는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은혜의 기름이 그 옷 맨 가장자리 끝까지 다 흘러 들어갑니다. 그래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성도라 해도 그 머리에 부어진 것과 똑같은 값비싼 양질의 거룩한 기름(聖油)를 소유하게 됩니다.”(찰스 스펄전) 위와 같이 스펄전도 그리스도에게 임한 동일한 거룩함이 성도에게도 공유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중요한 교회의 속성은 유일성과 보편성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가 존재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단 하나의 교회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여러 개가 아니기에 아래 구절처럼 단 하나의 몸, 즉 단 하나의 교회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한 분이시니”(엡 4:3,4) 물론, 시대별로나 지역별로 여러 교회가 존재합니다. 초대 교회에는 에베소 교회, 고린도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등이 있었고, 중세시대는 왈도파, 롤라드 등이 있었으며, 종교개혁 후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이 존재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7)는 구절처럼, 한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교회라면 모두 한 교회입니다.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들과는 별도로 유일한 교회(the church)가 존재합니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의 일원이 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The Church and the last things 중) 20세기 최고의 강해설교자로 알려진 로이드 존스 역시 위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의 유일성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가시적인 교회들의 일원인 교인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인 유일한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만이 그리스도인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외형적 신앙인인 교인과 참된 신앙인인 그리스도인의 구별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한 장로는 전화 통화에서 ‘왜 남의 교회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교회를 비판하려면, 등록교인이 된 뒤 내부로 들어와서 비판하라’고 강변했다.”(중앙일보, 2017. 11. 14) 위의 기사의 한 장로처럼 ‘내 교회’와 ‘남의 교회’를 구분하는 교인들이 많은데, 이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참 의미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교회의 속성은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입니다. 즉, 초대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 등 하나님이 쓰신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의 유산을 공유하지 못하면 바른 교회로 설 수 없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하나님은 위와 같이 당신의 자녀들 곧 교회들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을 선하고 아름답게 보시며 영생의 복을 내리십니다. 많은 교회들이 위의 구절을 잘못 인용하여 자기 교회 내 교인들을 통제하는데 남용하기도 하는데, 위는 명백히 유일한 하나님의 교회와의 연합을 의미하지 어느 특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개교회적 연합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성령 강림의 날’이며, 그 이후 예루살렘을 비롯한 각지에 교회, 즉 신자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마침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종교학대사전) 위의 설명처럼, 초대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 없이 몸으로만 예수님과 함께했기에 어려움이 오자 모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한 후에는 사람들이 제자들을 비로소 '그리스도인을 닮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그리스도인'으로 불렀고, 그리스도인이 된 그들로 인해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교회의 타락은 성령으로 시작한 교회가 육체, 곧 사람의 영향을 받을 때입니다. 입술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마음은 예수님이 아닌 사람의 영향을 받고 산다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따르는 참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롬 2:28)라는 구절처럼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인일 뿐입니다. “성도는 그 마음이 늘 주님의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빛을 지니고 다니며 주변에 행복을 퍼뜨려야 합니다.”(찰스 스펄전, 1862년 9월 28일 주일설교) 인류의 행복을 위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통해서는 행복이 전달됩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을 품은 표면적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거나 마음을 닫습니다. 그렇기에 이 시대에는 어느 때보다 성령으로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람이 아닌 성령의 인도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요일 2:27)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요 14:26) 위와 같이 참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존재는 오직 성령뿐입니다. 물론, 목회자와 교사들도 있지만 그들은 성령의 도구가 되어 가르치는 존재이지 그들 스스로가 가르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 누구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 스스로 가르친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위치에 서게 되며, 그 가르침을 받는 자들 역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유일한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온 인류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세상에 밝히고 영원한 행복을 전하는 거룩한 성도들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의 바른 신앙생활 역시 사람에게서 벗어나 오직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 2:13)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2. 새해 변화의 근원
“2017년 정유년이 가고 2018년 무술년이 성큼 다가왔다. 사람들은 남은 기간 동안 한 해를 정리하고 신년 맞을 준비를 한다. 새해를 맞이해 결심하는 계획과 다짐은 연례행사처럼 익숙한 일이 됐다. 그러나 굳은 결심도 채 3일을 이어가지 못한다는 ‘작심삼일’의 굴레를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는 작심이일, 작심일일이라며 하루, 이틀도 채 안 돼서 포기하는 이들도 있다.”(아시아경제, 2017년 12월 28일자) 2018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해가 되면 지난 해의 잘못된 삶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 하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원치 않는 삶이 반복된다면, 근본적인 부분부터 돌아봐야 됩니다. 사실 모든 인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삶의 행불행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데, 이상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주는 마음을 따라 사는데도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근본 문제일까요? 만일 어떤 사람이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면서 자기 말대로 하라고 해서 그 사람의 지시대로 투자를 했더니 모두 잃었는데,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된다면 그 사람의 지시를 따를 사람이 있습니까? 이처럼 단순히 자신을 위해 주는 마음을 따르기 전 마음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불행을 자초하는 인간의 성품을 파악하여 평화를 모색한 시도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특히, 처음으로 전 세계적인 대량 인명 살상을 경험한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에게 인류의 평화 정착 방안을 모색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세계 평화를 책임지고 있는 국제연맹의 요청에 막중한 책임을 느끼며 인류가 걸어온 불행의 역사에 대해 연구를 했는데, 궁극적으로 인간 본성에 의한 평화 달성 여부 자체가 의문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참혹한 전쟁과 파괴가 쉬지 않고 이어져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신분석 이론의 창시자이자 당대 최고의 심리학자였던 프로이트에게 아래 내용의 편지를 보내 문의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의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인간이 증오와 파괴를 열망하는 이상 심리에 저항할 수 있도록 인간의 정신 발달을 통제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문입니다.”(아인슈타인, 1932년 7월 30일) 그러자 심층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연구해 온 정신분석자 프로이트는 아인슈타인의 편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답장을 보냈습니다. “인간이 무언가에 자극을 받아 전쟁을 할 때는 전쟁에 찬성할 수많은 동기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공격과 파괴에 대한 욕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역사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많은 잔학 행위는 인간의 마음 속에 공격과 파괴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강하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뒷받침합니다.”(프로이트, 1932년 9월) 즉, 프로이트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 속에는 공격과 파괴에 대한 욕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에 인간의 성품에 의한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평화를 모색한 국제연맹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얼마 되지 않아 더 무서운 전쟁인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는 단순한 노력이나 법으로서의 통제가 아닌, 인간의 악한 본성 자체가 부인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그래서 우리의 본성을 잘 아시고 인류의 행복을 위하시는 하나님은 위와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를 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사기꾼처럼 결국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찰스 스펄전은 아래와 같이 언급했습니다. “에스겔 36장 26절은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으로 ‘내가 너를 만들었으니 너는 스스로 너를 만들려고 하지 마라. 내가 다시 너를 만들겠다. 새로운 마음을 네게 주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 가려져 있는데, 실상은 기초가 무너지고 가장 높은 지붕에서 가장 낮은 기초까지 전체적으로 썩은 집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고치려고 하시지 않고 모두 무너뜨리고 새 집을 지으려고 결정하셨습니다. 누구라도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알게 되면 절대 고칠 수 없고 다시 만들어야 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향상시키려는 사람은 서쪽으로 부는 바람을 따라 도는 바람개비를 동쪽으로 돌리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손을 떼면 바람개비는 제 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바꾸려고 하는 시도는 헛될 뿐이며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사자의 성품을 갖고서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다른 마음을 가지는 완전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본성이 필요합니다.”(찰스 스펄전, 1858년 9월 5일 집회설교 중) “하나님이 주신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민감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그 의지는 하늘의 숨결이 불어올 때마다 사시나무처럼 떨고, 하나님의 성령의 미풍이 불어올 때마다 버드나무처럼 고개를 숙입니다. 중생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적 의지는 망치질로 형태를 만들 수 없는 차갑고, 단단한 쇳덩어리 같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마음은 녹은 금속같이 은혜의 손에 의하여 곧 조형됩니다. 이 거듭난 새 마음은 모든 영적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축복이 그 새 마음에 옵니다. 새 마음은 하나님의 영예와 찬양을 위하여 하늘의 모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새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부드러운 새 마음은 죄를 막는 최선의 방어이고, 천국을 위한 최고의 준비입니다. 거듭난 새 마음은 그 마음의 망루 위에 서서 주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여러분은 이 부드러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찰스 스펄전, 1873년 8월 31일 주일설교 중) 그렇기에 새해에 가장 필요한 것은 새로운 각오나 새로운 다짐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자신의 마음의 정체를 발견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로운 마음을 얻어야 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변화된 축복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곳을 방문하신 분들 중 아직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마음을 얻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새해에는 꼭 새 마음을 얻는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1. 헛된 크리스마스 선물
"그것은 델라가 오래 전부터 갖고 싶어 하던 물건이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꽂으면 꼭 어울릴 빛깔이었다. 델라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핀을 가슴에 품고 짐에게 말했다. ‘제 머리카락은 무척 빨리 자라요.’ 델라는 애써 웃으면서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짐에게 건네주었다. ‘어때요, 근사하죠? 시곗줄이에요. 이걸 구하느라고 온통 거리를 쏘다닌걸요. 당신 시계, 이리주세요. 시곗줄에 채운 모양을 보고 싶어요.’ 짐은 시계를 꺼내는 대신 빙긋 웃으며 다시 한 번 델라를 껴안았다. '당신 머리핀을 사는 데 돈이 필요해서 시계를 팔아 버렸어.'” 위는 오 헨리의 단편소설로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원제는 <The Gift of the Magi>로 ‘현자의 선물’ 곧 ‘동방박사의 선물’이란 의미입니다. 오 헨리는 가난한 이들 부부의 선물이 아기 예수에게 드린 동방박사의 선물만큼이나 가치 있다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휴일인 크리스마스는, 지구촌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세계인의 축제입니다. 여러 매체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와 가장 연관된 단어로 선물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산타클로스의 선물이 아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크리스마스는 350년에 ‘예수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성탄절로 공식 선포되었습니다. 당연히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의 탄생을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들을 보면 대부분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에게 동방박사들이 선물을 들고 와서 아기 예수에게 드리는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 하지만 동방박사들이 선물을 드리기 전 하나님은 먼저 천사들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위와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한 최고의 선물로 예수님을 준비하셨고, 마침내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위는 가장 널리 알려진 성경 구절로, 세상의 실상과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명확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세상은 멸망을 향해 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사람들이 멸망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부분은 멸망과 영생입니다. 서두에 소개한 델라의 머리를 위한 짐의 머리핀과 짐의 시계를 위한 델라의 시곗줄처럼, 받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선물이라면 진실로 좋은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꼭 필요한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위한 영생의 선물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범죄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죄와 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는 말은 쉽게 하면서도 죄로 인해 마땅히 받는 형벌에 대해서는 심각히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를 가지고 살면서도 장차 올 심판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비 없이 살아갑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젊은이 2명 중 1명, 즉 절반이 에이즈로 사망할 것임을 알고 우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일은, 통계 자료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이 모든 감염 사례와 그에 따르는 인간의 고통을 예방할 수 있었고 또 앞으로도 예방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넬슨 만델라, 제13차 국제에이즈회의 중) 470여만 명의 에이즈 감염자를 보유하여 세계 최대의 에이즈 국가라는 남아공의 전 대통령 만델라의 안타까운 발언처럼, 에이즈는 예방이 가능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의 의식입니다. 2001년 에이즈 전문가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염병’으로 규정지었지만, 에이즈가 만연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죄를 여전히 갖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죄로 인해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결국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됨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내버려두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인류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속죄를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것입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히 10:12) 성경은 일관되게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넘겨 받으신 후 그 죄의 삯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심으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신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깨끗이 씻겨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으면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요 3:36)라는 말씀처럼,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요 10:28)라는 말씀처럼, 멸망 없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으면 결코 불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금수저, 은수저’ 라는 말을 하며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영생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위치는 연극의 배역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왕의 배역도 있고 거지의 배역도 있지만 잠시 머무를 뿐 실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보다는 영원한 세계에 초점을 맞추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 6:7) 위의 말씀처럼, 세상에서 얻은 것은 세상에서만 잠시 사용될 뿐입니다. 그 사실을 잘 아시기에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세상의 지위나 권세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고 가르치시며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려고 하셨습니다. 이는 완전한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위는 영생을 얻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기에 항상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도 부요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람이 되도록 예수님을 통해 속죄와 영생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편에 있습니다. 서로의 선물을 누릴 머리카락과 시계를 잃어버린 델라와 짐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최고의 하나님의 선물일지라도 받지 않으면 헛된 선물이 됩니다. 왜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않는 걸까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마 9:12)라는 말씀처럼, 자신이 죄로 인해 멸망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아서 입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일지라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 헛된 선물로 만듭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7)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관에 손님들로 가득차서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가 머물 수 없었던 것처럼, 완전한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 대신 본인 생각에 행복을 줄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로 그 마음을 채운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완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며, 심령이 다른 것들로 채워져 가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일시적인 기쁨을 줄 뿐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크리스마스 선물은 영원한 기쁨을 주십니다. 이 귀하고 복된 하나님의 선물을 더이상 헛된 선물로 남겨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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