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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신문에 2022년 5월부터 연재되는 제임스강 목사의 ‘행복신앙세미나’ 시리즈
13. 심판을 경고하신 예수님의 본심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삶에 반드시 끝이 있다는 사실은 인생의 가장 심오하고 근원적인 진리이며,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죽음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EBS 다큐프라임 죽음) 위의 언급처럼 죽음은 삶과 동일하게 인류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연적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립니다. 다만 막연하게 ‘죽음은 삶을 포함한 모든 것들의 끝’이란 인식이 팽배하여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불행을 끝내는 방편으로 죽음을 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죽음은 결코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죽음은 무섭고 두려운 사건이며, 우리는 여러 면에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듯하면서도 죽음의 공포는 여전히 인류 공통의 것으로 남아 있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쳐 ‘죽음’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타임〉지 선정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언급처럼, 죽음은 두려움과 공포를 수반한다. ‘죽으면 끝’이라는 인식이 사실이라면, 죽음으로서 불행도 끝이 나는데 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과 공포를 갖고 있는 것일까? 이는 죽음이 결코 불행의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죽음에 대해 경고하신 하나님은, 죽음이 필연이 된 모든 사람에게 위와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즉,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기에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는 이 심판에 대한 본능적 잠재의식 때문입니다. 마치 놀이동산에서 유령의 집에 들어간 후 문 뒤에 뭐가 있을지는 몰라도 뭔가 무서운 것이 있을 것이라는 잠재의식에 문을 열 때마다 두려움이 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에 아름다운 요정의 집에서는 문을 열 때마다 기대감이 들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은 자신이 죽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됩니다. 두려움과 공포인지, 아니면 기대감과 희망인지를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시 96:10)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공평한 판결을 내리는 공의로운 재판장임을 위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판결의 대명사가 된 솔로몬의 판결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행했던 것으로 사실은 창조주 하나님의 판결이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는데,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한 심판 곧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불행한 사고나 큰 재난이 발생했을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생지옥’입니다. 사실 지옥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죽음 이후 영원한 세계에서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옥을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고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대개 죽은 사람이 세상에서 지은 죄로 인해 형벌을 받는 곳을 지옥으로 알고 있는데, 처음에는 사람을 벌하기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벧후 2:4)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계 20:10) 위와 같이, 지옥은 범죄한 천사들 곧 마귀를 벌하는 곳이었습니다. 천사는 영원히 존재하는 영적 피조물이기에 형벌도 영원히 존재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막 9:43)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즉, 지옥은 영원한 불행의 장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령인 마귀가 지옥에 가야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자신은 지옥에 갈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행복을 진정으로 위하시는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 8:44)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는 인간의 영혼이 태어날 때부터 마귀로 말미암아 죄에 물든 채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영원한 불행의 장소인 지옥이 아닌, 영원한 행복의 장소인 천국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간의 실상을 가르쳐준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경고를 받아들여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야만 지옥이 아닌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12. 불행의 시작과 불행의 유전
“8년 전 장난으로 민달팽이를 먹었다가 마비 상태에 빠졌던 오스트레일리아 남성이 28세 나이에 사망했다. ... 친구들은 만취한 그에게 민달팽이를 생으로 먹지는 못할 거라고 놀렸다. 그러나 그는 먹었다. ... 며칠 후 그는 다리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시험 결과 민달팽이 기생충인 쥐 폐선충이 발라드의 뇌를 감염한 것으로 나타났다.”(허프포스트코리아, 2018.11.06) 위 기사는 먹지 말아야 될 것을 먹음으로 발생한 한 청년의 불행한 죽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생충을 가진 민달팽이를 생으로 먹음으로 죽음이 찾아온 것처럼, 인류 최초의 죽음 역시 먹지 말아야 될 것을 먹음으로 찾아왔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육체와 영혼을 가진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생명과 죽음이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과 죽음, 그리고 영혼의 생명과 죽음입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 9:60)는 구절에서, 앞의 죽은 자들은 영혼이 죽은 자들이고, 뒤의 죽은 자들은 육체가 죽은 자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의 죽음만을 죽음으로 생각하지만 인류 최초의 죽음은 영혼의 죽음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그들은 여전히 호흡하고 움직였습니다. ‘심박동과 호흡이 영구적으로 정지’ 될 때를 육체의 죽음으로 판정 내리기에, 그들은 육체의 죽음을 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육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다음과 같이 그들의 마음에 먼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즉,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선악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두려움을 가져다주었으며, 결국 하나님을 피해 숨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또 다른 의미는 분리인데, 아담과 하와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분리되면서 그들의 영혼이 죽었습니다. 이 죽음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분리로 인한 불행의 죽음입니다. “분만하는 과정에서 아기가 우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만 과정에서 다소 폭력적인 분만 과정이 있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우는 것이다.”(하민숙, 산부인과 전문의) 모든 아기는 엄마의 뱃속에서 출생하면서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는데,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 중 하나는 출산의 고통 때문입니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창 3:16)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하와에게 출산의 고통을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신생아 역시 함께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를 짓지 않은 신생아에게도 이러한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롬 5:16)라는 구절처럼,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와 사망이라는 불행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 유전된 불행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시 51:5)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시 58:3) 위와 같이 모든 인간은 유전된 불행으로 인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죄악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아야 됩니다. 사실 고통은 이상 징후를 알려주는 신호와 같습니다. 고통이 있어야 해결책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암에 걸리자마자 고통이 온다면 모두가 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당신을 떠난 모든 인간에게 불행의 출생 시부터 고통을 허락하심으로 불행에서 벗어나길 바라셨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가서 맛보는 고통과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고통을 맛보도록 허락했지만, 그로 인해 아버지에게 돌아옴으로 근본적인 불행에서 벗어나길 바랐습니다. 아래와 같은 하나님의 본심처럼 말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렘애 3:33)
11. 완전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행복
“사랑에는 한 가지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프랑스 근대소설 창시자인 스탕달의 언급처럼,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즉, 사랑의 대상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자 하는 것이 사랑의 법칙입니다. 생성되면 모두 배출해야 되는 모유와 같은 사랑을 가진 하나님은 이 사랑의 법칙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미숙한 사랑은 ‘당신이 필요해서 당신을 사랑한다’ 고 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사랑하니까 당신이 필요하다’ 고 한다.”는 윈스턴 처칠의 언급처럼, 하나님은 사랑하기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필요로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시고 완전한 사랑을 통해 완전한 축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려면 완전한 축복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은 인간에게 조금도 해를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모든 것에 유익을 주는 것이 바로 완전한 축복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는 성경 구절처럼,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될 점은, 몸과 혼과 영 이 세 가지가 서로 다르기에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복들도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뇌와 심장과 간이 서로 다르기에 각자에게 필요로 하는 영양소가 다르듯이 말입니다. 어떤 약은 뇌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심장에는 영향을 주지 않듯이 하나님의 축복 중 어떤 것은 육체에는 유익하지만 혼과 영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고, 또 어떤 축복은 영과 혼에는 유익을 주지만 육체에는 유익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을 이해하려면 인간을 구성하는 세 가진 요인인 몸과 혼과 영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몸에게는 몸에게 맞는 복을, 혼에게는 혼에게 맞는 복을, 영에게는 영에게 맞는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일대학교의 생화학자인 헤롤드 J. 모로위츠는 인간 생명은 600만 달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헤모글로빈은 그램당 285달러 ... 프로클랙틴은 그램당 175만 달러라는 것이다.”(한국일보, 2009.11.12) 위는 인간의 구성 중 몸에 관한 가치에 대한 기사입니다. 인간은 몸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욕구들을 추구하며,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최고다’는 말처럼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주면 쉽게 만족해합니다. 하지만 몸의 만족만으로는 온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혼(魂), 곧 정신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를 모두 넘겨주는 때에도 셰익스피어 한 명만은 못 넘긴다.”(엘리자베스 여왕 1세) “작가인 롤링은 그간 인세 수입만 11억 5,000만 달러(1조 3,100억 원)를 벌었고, 2016년 기준 해리포터 시리즈는 약 250억 달러(한화 약 28조 원)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시사저널, 2017.6.26) 위의 작가들처럼 정신은 상상력이나 창의력 등을 발휘하는데, 그 가치는 몸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 정신 역시 필요로 하는 여러 욕구들이 있어, 사람들은 몸의 만족이 채워지면 음악, 독서, 오락, 게임 등을 통해 혼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몸과 혼의 욕구를 채우는 것으로도 온전한 행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란 말처럼, 인간에게는 영(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은 영적인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만 종교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 영은 영원히 존재하기에 유한한 천하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위와 같이 영은, 손의 모양을 따라 장갑이 만들진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졌기에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만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이 만족할 때 인간은 비로소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몸과 혼, 그리고 영을 위한 행복을 모두 준비해주셨습니다.
10. 가장 큰 행복의 근원, 하나님의 사랑
“가장 큰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나온다.”(빅토르 위고) “가장 큰 행복이란, 사랑하고 그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앙드레 지드) 위와 같이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랑임을 명사들은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의 심리학자 라이스(Reis)와 게이블(Gable)도 수많은 연구 후,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사랑이라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명사들의 언급이나 연구 결과가 아니더라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사랑이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을 모두 시인할 것입니다. 즉, 사랑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행복을 위하는 성경 역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고 사랑을 최우선으로 두었습니다. 사랑이 인류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즉, 사랑은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음으로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기에 모두의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 역시 완전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면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래와 같이 확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어떤 해나 불행도 있을 수 없기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해하는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조차도 이 온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이유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는 구절처럼,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사랑이 쉬운 게임 같았어. 이제는 내가 어딘가 도망칠 곳이 필요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리메이크가 많이 된 곡이자 BBC 선정 ‘20세기 가장 위대한 명곡’으로 선정된, 세계 최고의 밴드인 비틀즈의 히트곡 의 가사를 보면, 위와 같이 사랑이 결코 쉽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언어가 다르면 소통되지 않는다. 외국어를 배우듯 사랑의 언어는 배워야 한다.” 그래서인지 뉴욕타임스 130주 초장기 베스트셀러이자 4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사랑에 관한 도서들 중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5가지 사랑의 언어>에서는 위와 같이 사랑도 배워야 됨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란 대중가요 및 영화의 제목처럼, 인류가 존재해온 이래 사랑으로 인해 아픔을 겪은 이야기나 사례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사랑은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인데, 왜 사랑 때문에 불행을 겪는 걸까요? 이는 사랑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단어 중 하나가 사랑일 정도로, 실제로 사랑은 인류의 다양한 분야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히 답변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반면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사랑의 정의를 명확히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즉, 사랑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자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을 이해해야 됩니다. 사랑에 서툰 이유는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이해하면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면 사랑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사랑을 오해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오해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오해하면 결국 불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큰 행복인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을 이해해야 되며,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이해해야합니다. 즉,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과 행복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9. 감사와 사랑의 영역, 예수 그리스도
“하와이가 미국 내 50개 주(州) 가운데 가장 살기 행복한 주로 선정됐다.”(2010년 02월 18일 뉴시스) “하와이 주민들은 ‘하루하루가 공포’ ‘어제보다 더 무서운 오늘’ 등의 입장을 트위터나 언론 등에 표출하고 있다.”(2018년 5월 21일 내외경제TV) ‘지상 최고의 낙원’으로 불리던 하와이가 2018년에는 화산 폭발로 인해 공포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인류에게 완벽한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는 장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 칼럼에 언급한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는 구절을 통해, 인류에게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영역이 준비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 안’입니다. 식물에게는 생장점이란 것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이 생장점 안에는 바이러스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바이러스보다 더 빠른 세포의 움직임이 쉼 없이 일어나 바이러스가 발붙일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는 불행이 발붙일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은 불행이 존재할 수 없는 완벽한 행복의 영역으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가장 중요하기에 성경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온 세상에 홍수가 임하여 멸망을 당할 때 노아와 가족들을 보호했던 구원의 방주, 애굽의 모든 장자의 죽음 앞에서 안전했던 집에 발려졌던 유월절 어린 양의 피, 심판의 나팔 소리에 의해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유일하게 보존되었던 라합의 집에 걸렸던 붉은 줄 등등. 이처럼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성경은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한 완벽한 행복의 영역임을 끊임없이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완전한 행복을 누리길 원하시는데, 이 ‘그리스도 안’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무지할 따름입니다.’ 라는 그분의 목소리가 내게서 칼을 뺏어갔소.”(영화 벤허 중) 벤허는 1959년 미국에서 개봉되어 11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 역사상 최고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외형적으로는 벤허가 주인공이지만, 복수에 불타는 그를 위의 대사처럼 변화시킨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 진짜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원작 제목도 [벤허, 그리스도의 이야기]인데, 작가 루 윌리스는 원래는 철저한 무신론자로 오류를 밝히기 위해 성경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구하면 할수록 성경이 진리인 것을 깨닫게 되어 결국 독실한 신앙인이 된 후 벤허를 집필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킨 예수 그리스도는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와 함께 세계 4대 성인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전(BC, Before Christ)과 후(AD, Anno Domini)로 역사가 나누어지듯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분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 중 하나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위한 당신의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로, ‘그리스도 안’ 이란 ‘하나님의 사랑 안’이란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난 칼럼에 언급했던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는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을 하십니다. 이 완전한 사랑 안에는 불행이 있을 수 없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 없고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행복과 감사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8. 행복을 지탱해주는 기둥, 감사
“많은 사람이 저에게 팔 다리가 없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느냐고 물어봐요. 우리는 매일 매일 선택할 수 있어요. 가질 수 없는 것에 화를 낼 것인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해할 것인지” 위는 2013년 힐링캠프에 출연한 닉 부이치치의 강연 내용입니다. 닉 부이치치는 1982년 호주에서 팔 다리가 없는 기형으로 출생하여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15살에 신앙을 가지면서 마음이 변화되어 현재는 ‘희망의 아이콘’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세계적인 강사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팔 다리가 없는 조건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이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몰핀은 진통제로 널리 사용되는데, 엔돌핀은 몰핀보다 100배의 효과가 있어 ‘암 치료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이돌핀은 엔돌핀보다 무려 4,000배나 더 효과 있는 ‘행복 호르몬’으로, 감동을 받거나 감사가 가득 찰 때 발생한다고 합니다. 즉, 감사는 행복을 지탱해주는 기둥으로, 감사가 있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행복은 감사하는 자의 몫"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롬 1:21) 위의 구절처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알았지만 감사가 없었습니다. 팔 다리가 없어도 감사가 있으면 행복할 수 있지만, 낙원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류의 첫 범죄는 감사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는 기독교 철학자 프란시스 쉐퍼의 분석처럼, 감사 없는 마음을 가진 아담과 하와는 결국 범죄함으로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롬 1:21)라는 구절 속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감사는 영어로 ‘Thank’ 이고, 생각은 ‘Think' 인데, 두 단어의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즉, 감사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어, 바른 생각을 하면 감사할 수 있지만, 허망한 생각 속에 들어가면 감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감사를 불러오는 것일까요? “내 인생에서 행복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1999년 갤럽의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된 헬렌 켈러는 눈을 감기 전 위와 같이 말했습니다. 생후 19개월 만에 열병으로 인해 시각과 청각, 그리고 언어를 잃어 평생 장애자로 살았던 헬렌 켈러는 어떻게 ‘항상 행복할 수 있는 완벽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을까요?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이다."(빌헬름 웰러) “감사의 분량이 행복의 분량이다.”(타고르)는 말처럼, 완벽한 감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감사는 완벽한 행복을 가져다주는데, 완벽한 감사는 다음과 같은 감사입니다.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헬렌 켈러) 여기서 주목해야 될 부분은, 헬렌 켈러의 감사는 좋은 조건으로 인한 감사가 아니라, 역경으로 인한 감사라는 것입니다. 좋은 조건 안에서는 누구나 쉽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온전한 감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쁜 조건이 오면 감사가 나오지 않고 행복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온전한 행복을 위한 성경은 감사에 대해 이렇게 조언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범사에 감사’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범사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일이기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완벽한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이 ‘범사에 감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면서도 ‘범사에 감사’하는 길로 나아오지 않고 있거나, ‘범사에 감사’하는 길로 나아왔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7. 분열과 불행의 경계거리, 사탄
2018년 4월 1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평화 협력기원 공연에서 마지막에 함께 부른 노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었습니다. 이어서 열린 합동 공연의 주제는 ‘우리는 하나’ 이었습니다. 통일은 말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으로 분단 후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까지 겪은 남북한의 평화는 하나가 될 때 정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통일로 말미암아 하나됨으로 평화가 정착되는 것은 인류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변함없는 진리로, 하나가 될 때 모든 전쟁과 불행이 사라집니다. 반면에 하나에서 나뉘는 분열에서 모든 불행이 시작되는데, 이러한 분열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계 12:7,8) 성경은 하늘에서 일어난 최초의 전쟁에 대해 위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자기를 하나님과 같이 높이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천사장 루시퍼가 자신을 따르는 타락한 천사들과 함께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여 온 우주에서 최초로 분열을 일으킴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엡 4:6)라는 말씀처럼, 만유인 모든 것을 통일하심으로 인류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시고자 하시는데, 사탄은 또한 이를 대적하여 인류를 하나님과 분리시킴으로 불행 속으로 빠트리고자 합니다. 이에 인류의 행복을 위하시는 하나님은, 천사장 루시퍼가 타락하여 악의 근원이 되자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경계거리가 되고”(개역성경 겔 28:19)라는 말씀처럼, 인류에게 사탄이 반드시 경계해야 될 존재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계 12:9)는 구절처럼, 사탄은 인간을 꾀어 불행 속으로 이끌어가려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 사람 아담의 아내인 하와는 자신을 불행케 하려는 사단을 경계하지 않은 채 그의 꾀임에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1~4) 이처럼 사탄은 ‘하나님이 너희를 정말 위하시는 줄 아느냐?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아. 그건 거짓말이야!’라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하와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고, 결국 인류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불행 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특히,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자마자 눈이 밝아졌는데, 그 눈으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창 3:8)숨으며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과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섯째날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구절처럼, 아담과 하와를 보시면서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눈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온 세상에 임한 심판의 대홍수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사람은 노아였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12:1)는 구절은, 영어 성경에서는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the LORD.”로, “노아는 하나님의 눈 안에 있는 은혜를 발견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눈은 은혜를 품은 눈인데, 노아가 그 눈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인간을 보십니다. 은혜란 값없이 복을 주시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대하신다는 것은 조건 없이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의 눈 앞에서는 누구나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고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탕자였던 둘째 아들이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아버지가 가진 이 은혜의 눈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고 밝혀진 아담과 하와의 눈이나 아버지에 대해 불평했던 맏아들의 눈처럼,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다른 눈을 밝혀서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하게 만들어 결국 불행 속으로 빠뜨리고자 하는 경계거리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6. 불행보다 더 큰 문제, 자기 판단
성경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한 삶의 터전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 후 인간을 창조하셔서 그곳에 두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에덴이란 이름의 동산으로 ‘낙원’ 곧 영어로는 ‘파라다이스(paradise)’인데, 국어사전은 ‘걱정이나 근심 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인류의 행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 걱정이나 근심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낙원을 인간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곳에서 인간이 행복을 누리고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담은 여전히 낙원에 머물러 있음에도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라고 불행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아담이 두려움의 원인에 대해 말한 답변은 정확한 불행의 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낄 때 스스로가 불행의 원인을 생각합니다. ‘~ 때문에 내가 불행해’라고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돈이 없어서 불행해, 사업이 실패해서 불행해’ 등 자신의 판단에 따라 여러 불행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불행은 우리 스스로가 정확히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몸에 병이 들었을 때 그 병의 원인을 우리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이 생기면 의사에게 찾아가 병의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의사가 정확히 병의 원인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의 불행 역시 우리가 아닌 영혼의 의사이신 하나님만이 정확히 아시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불행의 원인을 정확히 발견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담은 두려움을 느낄 때 그 두려움의 원인을 하나님께 나아가 묻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즉, ‘내가 벌거벗었기에 두려운 것이야’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불행을 자신이 해결하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따서 치마를 만들어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린 후에도 여전히 두려움을 느낀 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었습니다. 벌거벗은 것이 두려움을 느끼게 한 원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불행의 원인은 다른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당신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때 아담은 입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벗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에게는 아담의 벌거벗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문제 삼지 않는 벌거벗음을 문제로 여기는 아담의 판단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판단은 하나님과 다른 아담 스스로의 판단으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하나님의 판단을 거부하는 것이고, 결국은 아담을 불행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만일 아담이 자신에 대해 보시는 하나님의 판단 안에 있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향해 보시기에 좋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담의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을 떠나게 함으로 아담을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든 불행의 근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계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 안에서 다른 나무 열매들은 다 따먹어도 된다고 하셨지만,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게 되면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등 여러 부분으로 자기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는데, 문제는 그 판단이 하나님의 판단과 다르기에 결국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하나님을 떠나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의 죽음은 몸이 영혼을 떠나는 것이듯, 영혼의 죽음은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아담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그의 영혼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든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생긴 그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래의 말씀처럼 자기 판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판단을 믿는 것이 생명과 행복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전 4:5)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사 49:4)
5. 불행의 심리부검
범죄나 사고로 인해 사람이 사망하면 시신을 해부해서 종합 검사를 통해 사인을 파악하는 부검을 실시하는데, 자살 방지를 위한 심리 부검이란 것이 있습니다. 심리 부검은 자살에 관련된 정신적 요인들을 규명하는 방법으로 자살로 이끄는 마음 상태를 미리 파악하여 자살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1986년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가진 핀란드는 자살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세계 최초로 5년 동안 전문가 6만 명을 동원해 자살자들에 대한 심리 부검을 시행했습니다. 그 결과, 자살자 가운데 80% 정도가 우울증을 앓았는데 단 15%만이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에 핀란드 정부는 이 결과를 토대로 자살 예방 전략을 세워 대대적으로 자살 예방 사업에 나서기 시작했고, 매년마다 조금씩 자살율을 낮추더니 마침내 지난 2009년에는 절반 정도나 떨어뜨렸습니다. 그 후 다른 나라들도 핀란드의 심리 부검 제도를 도입하면서 좋은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Why Cry’라는 아기 울음 분석기가 있는데, 아기가 울 때 왜 우는지를 몰라 엄마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스페인에서 발명을 했다고 합니다. 아기가 울 때 이 기계를 갖다 대면 ‘배고픔, 졸음, 귀찮음, 심심함, 짜증’ 등 5가지로 표시가 되어 신속히 아기의 요구를 해소해주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불행의 원인을 파악해주는 기계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살의 심리부검과 같이 불행을 겪는 사람의 마음을 분석하여 그 원인을 파악하는 불행의 심리부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불행의 심리부검을 가장 먼저 시도하셨고 우리에게 꼭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그들을 에덴동산으로 이끄셨습니다. 에덴동산은 부족한 것이 없는 낙원으로 그들을 위한 행복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8절에 보면, 어느 날 아담과 하와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것을 봅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래와 같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처음으로 불행을 느끼고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위의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류의 불행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행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 추구해온 것은 낙원과 같은 좋은 환경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에덴동산이란 낙원 속에서도 아담이 불행했음을 통해 인간의 행복은 어떤 좋은 조건에 달려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전 2:10)라고 고백했던 솔로몬도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누려본 후 결국은 아래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그렇기에 행불행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 원인을 파악하고 가르쳐주시고자 질문을 사용하셨습니다. 노벨상의 3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연구 능력을 가진 유대인들도, 질문을 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게 하는 하브루타라는 탁월한 학습법을 사용합니다. 아마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학습 방법을 참고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불행에 빠진 아담에게 질문을 통해 그 원인에 대해 깨우쳐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사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몸의 위치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아담도 자신의 몸의 위치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은 아담이 모르고 있는 마음의 위치에 대한 질문입니다. 불행한 사람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것이 마음의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불행을 느끼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몸이나 주위 환경이 아닙니다. 오직 그들의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의 마음의 변화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불행의 원인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통해 깨우쳐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4. 행복은 하나님과 소통된 마음
행복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견해는 ‘행복은 욕구가 충족되어 만족을 느끼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욕구입니다. 욕구는 ‘무언가를 갖고자 원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옛날에 건망증이 심한 선비가 있었는데, 자기 스스로도 건망증이 심한 줄을 알기에 길을 나설 때면 담뱃대를 꽉 붙잡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길을 걸으면서 담뱃대 쥔 손이 뒤로 가면 “어, 내 담뱃대!” 하며 얼굴이 일그러졌고, 다시 손이 앞으로 나오면 “아, 여기 있네!” 하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소유와 무소유에 따라 영향을 받기에 모두가 욕구를 가지고 살면서 자기 원함대로 이루어지면 행복해하다가도 원함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행해합니다. 이에 그리스 철학자 메네데모스는 “원하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커다란 행복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행복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러셀도 “행복의 원리는 간단하다. 불만에 자기가 속하지 않으면 된다. 어떤 불만으로 인해 자기를 학대하지 않으면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욕구나 불만 없이 온전히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에서는 찾기 어렵지만 성경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다윗을 소개합니다. 그는 분명하게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은 영어 성경에서는 “I shall not be in want”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직역하면 “나는 원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다윗은 온전히 만족해하고 행복해하고 있었기에 원함과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이런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다윗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 다윗을 표현하신 하나님의 평가는, 세상의 사람에 대한 평가와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외모나 학벌, 집안이나 스펙 등 개인이 가진 여러 조건들을 보고 평가를 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마음과의 소통이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이란 말이 나오는데,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몸은 혈관이나 신경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어딘가 막히면 통증과 질병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의학의 침술은 막힌 곳을 뚫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막힌 곳이 뚫어지면 자연스럽게 치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양 의학에서도 “모든 병은 근본적으로 정체(停滯)이며, 모든 치료는 근본적으로 순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렘 2:19)고 하며 하나님과 끊어진 마음이 불행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경을 하나의 스토리로 요약하면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들 수 있는데, 비유 속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남으로 불행해졌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오면서 아버지의 기쁨과 함께하게 됩니다. 하지만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맏아들은 그 사실을 알고는 매우 화를 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함께한 사람들은 모두가 기뻐했지만 맏아들은 기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라고 했습니다. 맏아들의 마음이 행복을 마땅히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은 ‘재산을 다 탕진한 놈을 보면 화내는 것이 마땅하지’라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류의 행복을 진정으로 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겔 11:19)라고, 당신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과 소통된 마음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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